20201025 주일
시편 33:1-3
너희 의인들아
33: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33: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3: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들어가는 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우리가 주께 나오는 것은 우리의 결단이나 의지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시는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행이나 깨달음의 결과가 아니다. 곧 우리 자신은 아버지의 것이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그런 우리를 대상으로 예수님은 기도하신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 즉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뜻을 따라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으실 것이라 약속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그렇다면 왜 우리의 생활은 각박하고 건조한 것일까? 때때로 이어지는 어려움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 4:30).” 즉 우리는 참 자유자의 아들로 살아야 하는데 여전히 종의 아들로 산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31).” 이를 명심할 때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이 결코 사사로운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결국 우리는 이미 죽었던 자들로 ‘주의 권능’으로 살리셨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러한 오늘 우리의 속성을 바로 알아야 은혜가 크다. 전 주에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얼마나 죄 된 사람이었는가를 뼈저리게 알 때, 오늘 받는 이 은혜가 얼마나 귀한가를 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러한 우리, 하나님의 것으로 그의 아들 그리스도께 주신 자들로서의 특징 네 가지를 앞서 정리하였다. 이는 오늘 시편이 이를 두드러지게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이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 (우리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29-31).”
둘째,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셋째, 이를 위해 날마다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넷째,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긴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본문 이해
1연. 우리 의인들의 본분은 찬송이다(1-3)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1).”
늘 강조하고 또한 되새기지만, 우리의 신분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의인’이다. 그런 의인들은 주를 찬송한다. 찬송은 자랑하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다. 개념이 아니라 매우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이다. 오늘 시편 2절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재능을 가지고 찬송하며, 이어서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3).” 이는 마땅히 취해야 하는 성도의 본분이다. 날마다 더해주시는 새 마음으로 어제의 고난과 염려의 짐으로부터 놓여난다. 그렇게 우리는 또한 내일 염려를 내일에게 맡긴다. 오늘의 새 노래로 족한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대상 29:13).”
2연.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약속이고 보증이다(4-12)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4).”
성경을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 개혁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성서’라 하여 책을 본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으로 듣는다. 이를 예수님도 들으셨고,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하시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말을 듣는다는 것은 순종을 전제로 한다. 괜한 말은 농담이고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그저 좋은, 거룩한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은 소리다. 오늘 시편을 보면 5절에 말하길,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이는 듣는 자만이 알 수 있는 고백으로, 모든 만물을 봐도 알 수 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6).” 책을 보고 우리가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라 저의 말씀으로 우리가 순종함으로 우리 삶에 충만한 합일이 이루어진다(7). 온 땅은 이를 두려워하고(8), 이 모든 행적을 말씀으로 기록하여 견고히 하심은 모든 게 다 주의 계획에 따른 것이며(9), 세상 모든 사상은 무효로 그 계획들은 폐할 것이고(10),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대대에 이를 것이다(11). 이는 수천 년 전에 기록한 시편의 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12).”
3연. 인생은 책임이 따르는데, 그 책임을 주가 지셨다(13-19).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 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도다(13-14).”
우리는 ‘무조건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 땅에서의 천륜도 내가 임의로 선택하여 고른 게 아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것, 아버지의 자녀로 그 아들 그리스도에게 주신 바 된 것이어서 저가 우리의 죄를 책임지셨다. 그렇게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시고(15),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신다(16-17). 오직 아버지의 눈에는 아들만 보이듯이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주의 자녀들만 보인다. 그런 자를 살피시고 사망에서 건지시며 굶주릴 때 살리신다(18-19). 앞서 우리가 왜 회개를 하는지, 죄의 심각성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고, 날마다 새 마음을 충전하듯 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입에서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권선징악의 원리에 따라 세상의 책임이 주어지는데, 이와 같은 고백은 우리의 책임을 주가 감당하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4연. 믿음으로 우리는 인내하고 소망을 이룬다(20-22)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20).”
우리의 의인됨과 자유자의 아들이 됨을 알려주는 성경의 증거가 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1).” 그렇게 우리를 이끄시는 것에 대해 오늘 시인은, 우리가 즐거워하고 그 즐거움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이라 말한다.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21).” 본래 십자가는 얼마나 추악하고 더럽고 끔찍한 형틀인가! 온갖 죄를 지은 자를 매달아 처형하는 형틀을 우리는 주의 성호로 의지한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 시편을 마무리하면서 주께 기도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22).” 곧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아는 자는 자신이 얼마나 자격이 안 되는, 추하고 흉악한 죄인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눈부시듯 주의 영광을 앎으로 우리는 인내하며 나아간다. 하다못해 이 땅에서의 영광을 위해서도 그처럼 노력을 다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삶을 위하여는 어떠한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나오는 말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말씀을 마치며 요한복음 17장에서 들리는 예수님의 기도에 귀 기울여보자.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주신 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를 보전하시다 이를 아들 되시는 예수께 맡기신 것이다. 성부는 우리를 보전하셨고, 성자는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시며 결코 포기하지 않음으로 ‘하나도 멸망하지 않’게 하신다. 그렇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6:37).” 하시는 말씀이 이루어진다. 이는 우리가 ‘약속의 씨’이기 때문이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6-8).” 하시는 말씀이 그 의미다.
정리하면 ‘모든 사람’을 향한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여기에 ‘모든 사람’이 두 번 나오는데 서로 다른 존재들이다. 뒤의 ‘모든 사람’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들”로서 긍휼을 덧입은 우리들이다. 누가복음 14장에 비유로 하신 말씀이 그 의미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었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다. 그러나 저들이 ‘다’ 잔치에 온 것이 아니었다. 잔치할 시각이 되었을 때, 오히려 청하였던 자들은 “오소서” 하자, ‘다’ 일치되게 사양하여 각각의 변명을 대며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8-19).”
오늘 시편은 이를 분명히 하여 <너희 의인들아!> 하고 우리들을 따로 불러 세우며 우리에게 들려준다. 바울은 이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하였고, 이에 우리들은 “너희 의인들아 /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 마땅히 할 바로다(시 33:1).” 하는 말씀에서 정체성을 바로 알 수 있다. 찬송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리트머스종이 같다. 찬송은 감사다. 감사는 자랑이고, 성도의 자랑은 구원의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도 이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오늘 시편은 이 갚을 길 없는 은혜로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들을 ‘의인들아!’ 하고 불러 세우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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