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1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시편 76:8-9
인정받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적당한 분리관계가 일어나지 못하면 사람과 사람이 뒤엉긴다. 무엇이 우선인지 바로 하지 않을 때 모든 관계는 즉흥적이 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 말씀을 종종 되뇐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뒤섞임으로 ‘먼저’ 바라는 것으로 인해 우리의 염려는 한이 없다. 날과 날의 관계도 분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양심과 거듭남은 엄연히 다르고, 종교와 신앙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양심적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은 아니고 경건한 종교인이 바른 신앙의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이를 본질적으로 알 수 없으니 외형적으로 아는 것인데, 서로는 또 이를 보고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종교인으로 사는 기독교인은 중생이나 거듭남을 싫어한다. 속수무책으로 자신이 주인 될 수 없는 자신을 못 견뎌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발단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때문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구제와 기도, 금식, 의를 행함과 섬김의 모든 우선순위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는 말씀 앞에서 멈추게 된다(2). 자기만족으로 일어나는 행위는 종교이고, 거듭남으로 성령의 주도하심으로 일어나는 행위는 신앙이다. 어렴풋이 그 차이를 알겠다. 양심은 소극적으로 겁을 먹는 정도라면 겸손은 강하게 이끄심으로 강제되는 새 출발이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어제는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 속절없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는다.’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를 더는 위선적으로 포장할 수 없다. 전에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더러는 머리로 알고 있을 때는 대수롭지 않던 내가, ‘이제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바울의 고백을 절감할 수 있겠다. 아니 이제는 나도 그러지 못할까봐 안달이 난다. 그렇게 자기 의존과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는 그 이상의 경험이 거듭남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로이드 존스 목사의 <요한복음 3장 강해>을 읽으며 니고데모를 두고 뭉삭상함으로 나를 사로잡은 것 같았다.
로이드 존스는 말했다. ‘사람은 거듭남으로 전과 같이 건강할 수 없다. 더 이상 예전의 건강함으로 지낼 수 없다.’ 나는 이를 노트에 옮겨 적고 한참을 머금고 되뇌었다. 이상하게도 와 닿고 공감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점점 더 전에처럼 당당하지 못하다. 나는 나이들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전에는 누구라도 서슴지 않고 만나거나 어울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꺼려지고 싫은 상대가 분명하고, 애착이 가고 자꾸 마음이 쓰이는 사람도 있다.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 좋아하던 것들, 같이 마음껏 취하고 누렸던 것들과의 관계에서도 더는 못하겠다. 아니, 다시 그럴까봐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실제 나의 오늘이 전의 나의 모습보다 약하다. 그게 종종 다행이라 여겼다. 이를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내가 살았으나 나는 죽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곧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일은 이처럼 나의 겉사람은 낡아지고 나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어제는 이를 기뻐한다는 게 신기하였다.
그래서 누가 어떤 말을 하면 이제는 별로 흥미가 없다. 누가 죽음을 체험했다고 하고, 저승에도 다녀왔고, 무슨 엄청난 은사와 기적을 행한다고 하고, 남다른 신비를 경험했다는 따위의 말들이나 글에는 관심도 없다. 선생이 무슨 책을 보냈는데, 저이는 참 여전하시다. 영성이 어쩌고, 무슨 신학자로 어떤 성령의 역사가 어쩌고 하는 데서 온통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가 보았다. 누구는 대놓고 죽음을 연구한다고 했다. 의사 생활을 하다 ‘잘 죽는 길’을 찾는 중이고 같이 가담하는 사람들이 여럿이라고도 했다. 누구는 어느 연예인 기획사 대표이면서 가수인데, 저의 영성운동에 관심이 많은가 저의 글이나 믿음에 대한 주장에 심취하였다. 누가 어느 교회를 다니는데, 거기는요! 하면서 누구는 저들의 유별난 체험을 부러워하였다. 그런 데 나는 관심이 없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 외에 우리의 깨달음이나 가치기준이 소용 없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화로다, 나여!’ 정작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알겠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으로 됐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38:15).” 삼가 주의하는 게 지혜다. 가장 분리가 어려운 게 스스로들 자기 자신이다. 나의 나는 언제든 나의 주인이기를 원한다.
내 안에 두신 두려움이 복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이 두려움은 세상에서 어찌될까, 더는 아무 것도 아닐까봐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아니다. 여전한 나의 나 때문에 두렵다. 저들의 말에 혹하고, 누구를 그리워하고, 저와 견주어 나를 돌아보게 되고, 주눅 들고, 낙심하게 되는… 여전한 나의 나 됨이 송구하고 죄스럽고 두렵다. 하나님께 버림받을까봐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사랑에서 나는 여전히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로서 못 누리고, 못 느끼고 겉돌까봐 두렵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어쩌면 나의 심정은 확실히 달라진 거듭남의 증표와 같다. 전에는 ‘내가 뭐? 이 정도는 어때서?’ 하는 투의 생각들이 꽉 찼었다면, 이제는 그 모든 게 부끄러움이 되었다. 후회나 회한, 양심의 가책이나 반성의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의 어떤 강제하심을 느낀다. 이와 같은 근심은 하나님이 뜻대로 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또 그래놓고는 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주 앞에 내어드리는 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무너진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돌아보면 모든 날들이 부끄러움뿐이다. 전에는 그것으로 내가 건강한 줄 알았고, 겁 없이 굴며 마음대로 살던 사람인데, 더는 ‘예전처럼 건강한 자로 살 수가 없다.’ 그러니 예전에 나를 좋아해주던 사람들, 선생을 비롯해서 글방 아이들은 오늘의 나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불쌍히 생각한다. 한심하게도 보는 것 같다. 새해가 되면서 오랜만에 누구의 연락을 받곤 하면서, 전에 같이 낄낄거리며 같이 좋아할 수가 없는 것들에 대하야, 거듭났다는 것은 전에 살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산다는 소리로 이해된다. 누구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누구는 광신도처럼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여길 테지만.
주를 슬프시게 하고
제 가슴에서 몰아낸 그 일을
미워하나이다
-윌리엄 쿠퍼
쿠퍼는 그의 극심한 우울증에도 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신으로 시달렸다. 실제 자살기도도 몇 번씩 하고, 그야말로 주기적으로 심신이 미약한 자로 생을 살았다. 그런 그가 찬송시를 여러 편 지었고, 그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은 새찬송가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이다.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하겠네” 하는 가사 말미의 표현이 나는 자주 심금을 울린다. 그런 자의 입에서 찬송하겠다는 소리가 어찌 나올까? 누구는 예전의 나답지 못한 데서 실망한다. 대놓고 어떤 녀석은 지금의 나를 한심하다고 하였다. 전에 자신이 좋아하던 글방 선생은 없고, 낯설다고도 하였다. 나는 저 애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변명하지도 않았다. 내가 봐도 비루하고 비천하다. 전에 간강하게 즐기던 것을 이제는 겁을 내며 치를 떨고 멀리하는 것이야말로 이상하다. 그건 그렇다 쳐도 그때 그 사람들까지 가까이 할 수 없는 이유는 어찌 설명이 어렵다. 전에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누구의 연락을 받으면 부담이 먼저 앞선다. 저가 뭘 하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아는 게 두렵기도 하다. 그것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누구를 새삼 그리워할까도 두렵다.
누가 말하길 종종 내가 너무 정색을 한다고 했다. 쓸데없이 진지하다고도 한다. 웃자고 한 말인데 죽자고 덤빈다며 농담으로나 상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는 내가 부담스럽다는 소린데, 최근에 깨달았다. 누구는 그렇게 꺼려지고 누구는 새삼 마음에 두어 둘 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일이다. 심지어 누구를 마음에 두고 저를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도 이상할 때가 있다.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데 있어 나의 어쩔 수 없음이 늘어나고,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싫지만은 않기도 하다. 현실이 그러하고, 사느라 드는 수고가 힘에 겹지만 그러하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별개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이를 당하신 이가 오늘의 나를 아신다! 날 위해 기도하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탄식하심으로 나의 약함을 괴로워하신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막 7:34).”
우리는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그리하여 오늘 내가 사는 이 장막은 곧 무너질 것을 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누구는 늙으신 부모의 병들고 힘든 이생을 두고 염려하고, 누구는 곧 죽을 것을 두고 슬퍼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바른 분리관계가 성립되지 못해서이다. 구제할 때도, 기도할 때도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이미 다 아시는 이가 우리와 함께 계심을 자주 잊고는 한다. 오늘을 사는 까닭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19).” 곧 무엇에 마음을 두고 사는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 그래서 더는 청맹과니로 살 수 없다. 눈 뜬 장님으로 스스로를 믿는다 하는 이가 종교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본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22).” 오늘 시편은 이에 일침을 가하시는 것 같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시 76:11).” 드려지지 않는 모든 것은 버려지는 것이다.
우린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곧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14).” 그것은 내 안에 신성한 생명의 씨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0) | 2021.01.07 |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0) | 2021.01.06 |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0) | 2021.01.04 |
나를 따라오라 (0) | 2021.01.03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0) | 2021.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