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전봉석 2021. 1. 7. 06:09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마태복음 8:8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편 78:38-39

 

 

말씀 붙들고 힘내자. 누구에게 나는 권할 때 ‘말씀을 의지하자’는 말을 꼭 언급한다. 아니면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시 78:38-39).”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하루가 빠듯하니 꽉 찼다. 예수님의 날들도 다르지 않으시다. 하루의 시작이 ‘산에서 내려오시니’로 이어진다. 수많은 무리가 따랐고, ‘나병환자’로 지칭되는 완치불능의 사람을 낫게 하신다. 곧이어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자 한 백부장이 나온다. 저의 등장은 그의 믿음을 돋우려는 마태의 선택적 진술인 것 같다. 수하의 종이 병들었고, 저는 말씀만으로 이루실 수 있음을 믿었다. 저의 믿음을 예수님은 크게 보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상대적으로 믿음의 구별된 백성이란 자들의 작태는 가관이어서,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2).” 어쩌면 저들은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어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하시고, 저물 때 귀신들린 자들을 구하시고,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18).” 주님의 하루가 복잡다단하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20).” 그런 와중에도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 하고 아뢰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22).” 그럴 겨를이 없다. 함께 배에 오르신다. 큰 풍랑이 일자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다. 물을 잠잠케 하시고 저들의 믿음이 작은 것을 나무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26).” 모든 일의 주체이며 주인이신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도 우리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자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알아본다.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28). 저들을 쫓아내시고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하신다.

 

대략의 말씀을 읽고 되새기는 동안 누구 생각을 하였다. 전날에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치매 검사와 폐암 정도를 확신하고 집으로 모셨고, 친정어머니는 아작난 골반 뼈를 응급수술로 조각해서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그런 내용을 어제 점심께 출근길에 전하였고, 나는 위하여 기도할게 하면서 또한 저에게 말씀 의지하며 잘 견디라고 일렀다. 그런데 곧 오후에 요양병원에서 혼자 화장실엘 가다 모친이 또 자빠지셨다. 다시 응급으로 대학병원에 옮겼는데 골반에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며, 해도 위험하고 안 해도 위험하다는 말을 들으며 퇴근길에 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뭐라 위로를 할까? 다급할 때는 막내딸의 기도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며 같이 아멘을 하였다는데, 요양병원으로 옮겨 살만하다 싶으니 라디오와 법구경 책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러니 어쩐다? 라디오만 가져다 드리고 차마 불교서적은 가져다드릴 수 없었던 것인데, 이게 어디 사람의 의지로 될 일이겠나?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하루가 바쁘고 정신이 없어보였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때 나는 설교원고 뼈대만 잡아놓고는 손을 못 대고 있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 40:7).” 부디 저의 모친이 주 앞에 설 수 있기를.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아직까지 그 생명이 붙어 있을 수 없었을 텐데, 우리 육체는 가면 끝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앞두고 주의 긍휼은 기다리심이었다.

 

나는 그리 여겨졌으나 당장 저의 처지에 들려줄 말이 아닌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내가 왔나이다.’ 하고 주께 아뢸 수 있는 사람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하는 믿음으로,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이와 같이 영광된 존재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면, 말씀에 귀 기울여 주를 바랄 수 있는 믿음이 가장 귀한 것이었다. 그 말씀은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 16:7).” 밤마다 양심이 나를 교훈하게 하신다. 이는 바위를 깨뜨리는 일처럼 강력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이는 아는 자만 안다. 나는 누구와 대화할 때, 또는 뭐라 답을 적어 보내야 할 때, ‘말씀 붙들고 말씀만을 의지하자’ 하는 소리를 하게 되는 이유다.

 

그 말씀에는 불가능이 없다. 가장 어려울 것 같은, 우리의 골수를 쪼개고 심령을 뒤집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3:12-13).” 이 말씀을 되새길 때면 하루가 송구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래서 더는 헛된 것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사람을 의지하고 저들을 따르면 어쩔 수 없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부모를 공경하는 데 있어서도 다를 게 없다. 앞서 ‘그의 나라와 의’가 먼저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명백하다. 심지어 예수님은 검을 주러 오셨지 화평을 주러 오신 게 아니라고 이르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이 말씀은 참 받기가 어렵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5-36).” 문맥적으로만 봐도 거칠다. 씹어 삼키기에는 목에 걸린다. 그럼에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7-38).” 무엇이 우선이고 먼저인지, 이를 바로 알 때 오히려 질서 있는 공경과 섬김도 가능하다. 심지어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 즉 예수께서 오심으로 우리에게 걸림이 되셨다.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전에는 괜찮았는데 이제는 그것으로 괴롭다.

 

나는 저이가 법구경을 가져다주지 않았던 것은 믿는 자로 할 수 있는 가장 소극적이면서도 분명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우리가 무엇으로 사는가?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11).”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주의 인자와 진리로 우리를 항상 보호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결국 성경은 말씀으로 약속하신다.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40:16).” 하게 하셔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구원도 우리의 선택으로 믿음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는 곧 자라야 한다. 머물러 있는 떠다니는 고기는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도의 초보’란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안주하려는 것에 대한 경고다.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니 됐다, 하는 게 아니다. 생명이 있는 고기는 헤엄쳐 다닌다.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 ‘완전한 데로 나아간다.’ 이를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것이다. 여전히 한두 구절의 성경으로 족하고, 어린아이들을 위해 만든 그림책과 같이 글씨 적고 그림 많은 단순한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모든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의 역사하심을 붙들어야 한다. 아니면 감정에 휘둘려 우울해하고 속상해하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그러한 부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서로들 속상해하면서 여러 문제요소를 걱정할 수밖에 없으나… 그래서도 말씀 붙들자, 말씀으로 힘내자, 하는 권고는 공연한 게 아니다. 죽기 살기로 사는 일처럼 해야 한다. 언제까지 성경을 요절로, 몇 구절 인용으로, 누가 들려주는 핵심만 듣고 안주할 것인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사도들은 이를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5).” 내가 저에게 들려줄 게 그 말밖에 없었다.

 

우리는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우리가 사는 것이 단지 이생을 다하다 가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시 98:35).” 이를 명심할 때, “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53).” 반드시 주가 거두신다. 함께 하시고 보호하신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