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시편 77:19
주의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되 좁고 협착하다. 그리로 가는 자가 적다. 나는 이 말씀을 접할 때면 늘 같은 질문이 맴돈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나? 때론 보이지 않고 알 수가 없어 불안하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그리 읽는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시 77:19).” 솔직히 길은 잘 보이지 않고, 때론 이 길이 맞나 싶을 때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걸음이다. 걸음을 견고하게 하시는 것을 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40:2).” 이 일은 기다림의 끝에 오는 진술이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1).” 마치 기도와 같아서 막연하고 애매한 상태로 놓여 있는 것 같으나 이를 견디고 참을 수 있는 인내도 주신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응답이라는 결실은 기다림이라는 기도의 씨앗이 뿌려져서이다. 그러므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정작 이러한 기다림도 내가 내 의지로가 아니다. 성경을 주의 말씀으로 믿는 일도 실제는 내가 납득을 하고 이해를 다하여서가 아니다. 각양각색의 저자들이 서로들 시대를 달리하면서 쓴 66권의 성경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이야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개하고 나타내고 있다는 외적증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의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들리고 믿어진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내적증거이다. 곧 성령이 감동으로 쓰셨고 읽게 하시고 알게 하신다. 믿도록 설득할 필요가 없다. 그처럼 기도도 막연하기 그지없으나 나는 그 막연함으로 인내한다. 이를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나로 수렁에서 건지신 일을 두고서이다. 우리는 모두 속량할 길이 없는 자였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그저 값없이 받은 은혜라니! 나는 종종 가늠할 길 없는 은혜를 두고 막연한 느낌에 빠질 때가 있다. 당장은 이 길인지, 저 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앞날 같다. 그것으로 불안해하고 낙심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내 안에 두시는 어떤 확신, 그 믿음의 출처는 나에게서가 아니다.
일종의 강박처럼 나는 서둔다. 뭐든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을 원한다. 상대적으로 아내는 촉박하게 때론 조금 늦어서야 한다. 그러니 자주 불만이 튀고 불안이 가중한다. 가령 어딜 같이 가야 할 때 나는 그런 아내와 같이 동행하는 게 힘들다. 같은 시간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는 것을 원하는데, 그럴 때면 아내는 돌발적인 변수가 된다. 병원엘 가도 느긋하게,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도 돼, 하는 식이어서. 이런 것을 나는 못 견뎌한다. 누가 연락할 게, 하면 나는 그것이 신경 쓰여 그 시간을 비워두고 있다 번번이 당한다. 누가 오겠다하면 앞서 이런저런 준비를 해두는데 돌연 못 온다거나 그나마 연락이 없으면 상처가 된다. 하찮은 나의 성격은 그때마다 나를 찌른다. 병원엘 가도, 누굴 만나도, 나는 그 이전부터 가 있고 마음은 저 혼자 마중하다 지친다. 어쩌면 요즘은 그래서 아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신경이 자꾸 쓰이는데 그 마음을 표출하지는 못하니, 고스란히 불안이 되거나 불만이 되어 나를 못 살게 군다. 스스로 진단하면 그렇다는 소리다. 이는 싫고 좋고의 일이 아니고, 알고 모르고의 일도 아니다. 누구 일이면 느긋하고 의연하라고 권할 것이다. 그러니 그게 되나? 남에게는 된다 하고 자신에게는 번번이 진다.
그러니 나는 죽었고 나는 살아야 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죽지 않으면 다시 살 수 없고 살아서 죽으려니 이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나의 일상을 종종 성경의 이해와 연관 지어 보면 이해가 쉽다. 도무지 모르겠고 완전히 알 수 없는 내용인데,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고 그의 말씀으로 받는다. 이는 내 의지가 아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알 수 없으나, 그러하다. 알 수 없는데 그러하다는 것을 안다. 알겠다고 믿는 믿음의 의지가 아니라 저절로 그리 여겨지는 앎이라 때로는 이상하다. 그러니까 내 안에 알 수 없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나의 길을 여신다. 일상의 소소한 일과에서도 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그러하였다. 내 딛으면서는 불안이 밟히는데 지나고 나면 안도가 있다. 그렇게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이를 추구하는 게 내가 아니다.
어제는 먼 길을 걸어 병원에 약을 타러 갔다. 바람이 찬데 온 몸이 땀에 젖었다. 두 시부터 오후 진료인 걸 알면서도 한 시 십 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도 앞에 다섯이나 대기 중이었다. 나는 접수를 하고 밖으로 나가 양지바른 곳에 섰다. 찬 기운이 금세 몸속으로 파고들었으나 얼굴은 따가웠다. 나는 병원 대합실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이 어렵다. 우울하고 암울한 눈빛에 지레 속상하다. 한 여자가 울먹거리며 자신이 상담을 하고 아이 약을 타가면 안 되나? 되물었다. 접수처 직원들은 난감한 듯 당사자가 와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얘가 오면 가만 안 있을 텐데요, 어떻게 안 될까요? 아이엄마의 절박함이 나를 불안하게 하였고 안타까움은 고스란히 나를 흔드는 것 같았다. 모두가 어렵다. 사느라 사는 게 다들 고역이다. 안 그런 척 하고 평소를 꾸미다 병원에 오면 감출 수가 없다. 잠시 밖에서 서성거리다 들어오니 사람들의 수가 배 이상이나 늘어났다. 나는 결국 약만 타서 가겠다고 신청하여, 저들 무리를 황급히 빠져나왔다. 누구는 친정부모의 병치레로 만신창이가 됐다. 부친의 치매와 폐암 여부, 모친의 골반 함몰과 병실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뭐라 해줄 말이 없어 듣기만 하고 걸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4).” 나는 설교원고를 준비하다 한 구절의 말씀으로 굴복한다. 주를 의지한다는 것은 다른 데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늘 그러하길 기도하지만 기도는 또 언제나 막연하여서 기다림만 남긴다. 그러할 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오늘 우리의 이 모든 상황과 어려움이 오히려 정의를 행하게 하고 인자를 사랑하게 하며 겸손하게도 한다. 주님은 숨으실 수 없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막 7:24).” 우리가 빛으로 사는 동안은 감출 길이 없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이게 참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것, 다시 먼 길을 걸어서 돌아오다 누구의 소식을 듣고 주의 은혜를 빌었다.
내 코가 석 자인데도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 그렇듯 하나님이 나를 다루신다는 데 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 아는 체 하는 게 아니라, 이상하게 안다. 내 안에 이해를 두시고 더 알고자 하는 마음도 두셨다. 맛보았으면 그리 된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3).” 그리 하려고 그리 하는 게 아니라, 그리 되는 걸 보고 그리 하고 있었다.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내 의지로의 일이 아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알면 알수록 더 알아야겠다. 그래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 가치는 무엇을 견주어 설명할 수 있지 않다. 나조차 그 값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라다. 곧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이와 같은 신비를 두고 다른 무슨 기적을 더 바랄까?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먼 길을 걸어오다 누구와 통화를 잠깐하고, 나는 가만히 발치 끝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을 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해로 여길 정도로 내가 아는, 알게 된 이 앎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의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자신을 돌아보면 더 확실해진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이제는 알면서도 여전히 어쩔 수 없는 나를 제쳐두고, 내가 가장 나의 걸림돌이라. 이를 알수록 주의 은혜밖에는 답이 없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 최소한 나의 이 허접한 인생에서도 동일하셨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민망하고 부끄러운 것뿐인데, 오늘 말씀은 일갈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내가 하면 허사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 내 안에 두고 행하시는 이가 따로 계셨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사는 삶이다. 그렇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아, 언제쯤 이 고백이 내 것이 될까?
나는 좀 의연하였으면 좋겠다. 느긋하고 너그러웠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라도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11).” 전에는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말씀 앞에 서서 치를 떤다. 돌아보면 온통 부끄러움뿐인데 상대적으로 넘치는 은혜가 가득하였다. 고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자꾸 나를 돌아보게 하심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이는 나의 특권이 되었다. 기도는 결코 누구나의 전유물이 아니다. 구하다 보면 좁은 길로 가는 것이 복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 77:1).” 오늘도 주께 아뢴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16-17).” 길이 없는 것 같았으나 길이었고, 문이 아닌 듯하였으나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19).” 그렇게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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