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11:6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시편 81:11-12
말씀에 걸려 넘어진다. 진리가 우리를 무너뜨리신다. 걸림돌이 되고 함정과 올무가 되신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사 8:15).” 이에 오늘 주님의 말씀은 깊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6).”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 회의감에 물었다(3).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도 그럴 것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뭔가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달라,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시 81:11-12).”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누구나 자신들의 판단과 기준을 가진다. 믿음을 선택이라 여기고 신앙을 노력으로 바란다면 어김없다. 예수님은 이를 두고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신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주 앞에 내려놓고 쉼을 얻는 것으로 족하였는데, 그러기에는 자신들의 이상과 꿈이 너무 큰 것이다. 어느 탐사 프로에서 모 선교단체를 조명하였다. 성경공부니 전도에 대한 비전이니 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가르치는 자의 객쩍은 소리가 진리를 가린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어느 특정 세력의 주동으로 선동하고 이를 예견했던 자를 지목하며, 개발된 백신에 무슨 장치를 심어 세계를 조종하려 한다는 둥 차마 듣기조차 유치한 발설에 숱한 사람들이 몰려 숙식을 하며 집회를 하고 있었다.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는 말을 붙이기도 지겹다. 희한하게도 사람들이 몰려든다. 저 단체의 대표는 예전에 신대원 때인가, 수련회 때 초청인사로 한 번 본 적이 있다. 전도를 기치로 내걸고 미개발종족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사실과 자신의 견해를 섞어서 말하는 게 과장되다 싶기는 했다. 여하튼 별의 별 무리들이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솎아져 나오는 것 같다. 특징적인 것은 사람들이 엄청 모인다는 것이다. 사람의 수는 세력이 되고 돈이 된다. 진리와 비진리가 혼용된다. 저런 내용을 보다보면 피곤하다. 참 기를 쓰고 열심히들 산다. 종교의 힘은 무섭다. 나는 요즘 종교인과 그리스도인의 구분을 명확히 할 필요를 느낀다. 한데 묶어 혼용할 일이 아니다. 사람이 모이고 돈이 되면서 저들의 세계는 하나의 왕국이 된다.
우리는 누구의 사람도 어디에 속한 무리도 아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무엇이 들리는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하시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 듣게 할 수 없고 들려준다고 들을 리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다들 고단하고 피곤한 영혼이다. 주님이 손을 내미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곧 스스로 애써 수고하는 자는 영락없다. 열에 아홉이 자기 열심으로 종교를 삼는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6).” 이로써 가리고 덮으시며 진리를 보존하신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5).”
누가 늘 ‘나 때문이야’ 하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혔다. 딸애 회사에서 한 이가 그것으로 괴로움을 당한다. 회사 분위기가 안 좋아도, 누가 식사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거나 아예 그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아도, 저이는 그때마다 시달리는 게 ‘나 때문이야!’ 하는 수치심으로 받아들인다. 열심을 다해 교회를 다니고 신앙으로 산다고 사는 그와 같은 몹쓸 마음에 붙들렸다. 이는 상대적으로 자신에 대한 우월한 의식이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게 자신으로 인해,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논리인데, 과중한 기대치가 저의 영혼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이에 동조하여 스스로를 몰아가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이 뭔가 대단한 줄 아는 데서 온다. 자신이 아니면 진리가 무너질 것처럼 누구는 사람들을 선동하며 조종하고, 누구는 사람들로부터 조종당한다. 실은 다 자기 안의 만족함을 추구하는 데서 ‘종교적인 열심’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싫든 좋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있다. 이를 자신이 갈구하느냐, 주께로 내어드리느냐, 하는 게 문제다.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사람들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그 증거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그 열심이 모든 것을 삼킬 듯이 경건하고 헌신적이라 해도,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저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면 세상의 사람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배제하는 세계이고 가치이고 사고이다. 저들의 하나님은 힘이고 세력이고 권한이고 이상이고 낭만이다. 허구가 저들의 영혼을 흐려지게 한다. 우리가 이를 어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표현이 ‘알거니와’이다. 그리 안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좋은 게 아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의 기호와 성향에 따른 선택의 영역이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수준도 그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사랑은 의무다. 그리하여 거룩은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실존의 영역이다. 내가 누구에게 자꾸 마음이 쓰이고, 저가 싫은데 저를 위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주의 권능이다. 주의 마음으로 하는 게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세상에서는 좋아한다와 혼재됐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무조건이 아니라, 믿음이 기반이다. 우리의 믿음에는 덕이 따른다. 덕에는 바로 아는 지식이 부여된다. 지식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과도한 지식은 헛소리를 남발하고 남을 선동하려 하여, 스스로를 옥죄어서 자신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자책하게 만든다. 그것으로 열심을 다하는 삶은 끔찍하다. 절제하려면 인내가 필연적이고, 인내에는 경건이 우선한다. 경건의 실체는 형제우애다.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 저를 사랑하게 하시는 이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목사 고시 면접에서 ‘앞으로 어떤 목회자가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앞서 같이 나란히 앉은 이들처럼 거창하게 말할 수 없었다.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인데, 내가 스스로 어떤 목회를 꿈꾸겠나? 그때 내가 대답한 말은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내 것이 아니었다. ‘곁에 두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얼추 그렇게 대답한 것 같다. 그때 나이 든 어느 면접관 목사와 눈이 마주쳤다. 저의 판단을 알 수는 없으나 저도 나와 같은 심정이구나, 하는 느낌은 들었다. 이상하지만 들린다. 서로를 알아본다. 서로를 안다.
이를 나는 누구 앞에서 어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 자체로 신비하고 놀랍고 조용하며 은밀한 유대감이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그렇게 함께 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44).” 이러한 형상은 끼리끼리 통하는 원리와 같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함께 모여서 난다.’ 무엇을 좋아하고 누구를 좋아하는 따위로는 동물적인 본능에서도 다를 게 없다. 사랑은 실제 좋아하지 않아도 그리 하게 되는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건져내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4-5).”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것이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골 1:3).” 누구는 함께 아멘으로 화답하고 누구는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갈 길을 모색한다. 그러니 뭐라 한들. 전에 어느 아이가 어느 교회로 옮기면서 그의 열심이 전과 달리 일상을 위협하는 것이 되었다. 듣다보니 이상하다. 성경공부에 열을 올리고 세계복음화에 비전을 읊어대는데, 저의 비장함은 마치 전쟁터로 나아가는 군인같이 투철하였다. 이상하다싶어 알아보니 신천지같이 은밀하고 다락방처럼 열심인데, 무슨 주술을 외우는 것처럼 성경을 줄줄 꾀고 외워댔다.
그러한 열심 앞에 나는 두려움이 먼저 든다. 아무리 뭐라 해도 저의 귀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전화도 차단하고 연락도 안 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그 아이의 공격은 서로 다를 게 뭐 있냐는 거였는데, 같은 열심이라도 죽이는 열심이 있고 살리는 열심이 있다. 그러니 어쩌겠나? 거북하겠으나,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누구에게 적용하여 밖으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오늘 예수님의 본심을 나는 그리 듣는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6).” 뒤집으면 저이들은 실족하여 저리 더 죽어라 하고 제 힘으로 만회하려 하는 것이다. 아,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5).”
내 안에 주를 바라고 의뢰하는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기를. 쓸데없는 데 기웃거려 왜들 설교에 정당을 운운하고 정책을 비판하고, 코로나 사태에 대한 음모론으로 이를 성경에 결부시키는 소리를 해대는지 모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목사의 월권이 그 어떤 권력의 남용보다 무섭다. 말씀에 더하는 모든 소리는 헛소리다. 사람들은 자기 삶에 지쳐서 그런 소리에 현혹되기 마련이고 말씀에서 이탈한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6).” 하시는 주의 마음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오직 주밖에는 살 길이 없다.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시 81:1).” 사람들을 선동할 것 없고 그리 쓸려 다니는 사람들로 마음 쓸 거 없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13).” 이에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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