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34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편 80:17-18
말씀에 위로를 받는 사람이 있고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 8:13).” 성경의 이 한 구절이 우리의 자세를 교정한다.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14-15).” 지난 며칠 이 말씀으로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주의 말씀 앞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며 자신을 돌아보아 근신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오늘 마태복음의 전언도 같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흔히들 취향대로 믿는 것처럼 ‘좋으신 하나님’만을 강조하는데 그의 엄위하심 앞에 자중해야 한다.
우리의 안이함이 얼마나 단단히 굳어졌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이 아침, 시편의 말씀으로 기도를 삼는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 80:17-18).” 아니면 우리가 무엇으로 사는가? 허투루 듣고 고상한 척 구는 자는 엄히 다루신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립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가 있고 나중이 있다. 혼재되면 뒤틀리고 뒤틀린 영혼은 바로 설 수 없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10:36).” 하시는 말씀에서 나를 돌아본다. 저마다 자식이 우상이 되고 하나님보다 우선하였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7-38).” 심지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데 있어서도 자기연민에 사로잡힐 때 그 영혼은 고단할 뿐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심을 나는 그리 이해한다. 너무 자신 또한 애지중지할 거 없다. 나도 나를 먼저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 모두는 주를 먼저이고 나중에서야 저절로 이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결국 그 답은 하나다. 나로 하여금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삼으시려는 거였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곧 ‘세상에서 썩어질 것’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것들이다. 부모도 자식도 자기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모든 것은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타종교도 안 믿는 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안주하는 종교심이겠다. 자기 믿고으로 자신이 의지하고 추구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 열심과 성의가 자신을 죽인다. 그러한 저들에게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자비하셔야 할 의무가 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나를 도우시고 함께 하시고 보살피셔야 한다! 좋으신 하나님으로만 내게 좋아야 좋다. 이를 엄히 다루시는 데는 기질적으로나 성향상 맞지 않는다. 주는 내게 그리하시면 안 된다.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 하는 심정은 그래서다. 그래서 모든 걸 주께 맡길 수가 없다. 내가 알아서 할 건 알아서 하고, 열심히 알아서 믿는 믿음으로 족하다. 이는 자신의 열심이 자신의 우상이 되어 그의 종교성이 남들보다 투철하다. 그러다보니 실제 남들보다 선하고 의롭고 열심을 다하는 종교인이 훌륭하게 여김을 받는다.
하지만 이 모두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허사다. 번드르르하게 살고 말은 잘하나 스스로 다룰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고린더전서 13장의 서두에서 강조하는 것이 그러하였다.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로 열심이라 해도 사랑이 없으면 헛것이다. 사랑은 온전히 거듭남으로 내 안을 차지하시는 주의 영이다.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셔야 하는데, 본질적인 나와 성령은 맞지 않는다. 이 싸움은 필연적인 불화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나로 주를 더 의뢰하게 하시려고,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주는 나를 억제하시기도 한다. ‘세상’은 하나님을 배제한 모든 것이고, 이를 교묘하게 역이용하는 마음이 종교심이다. 스스로 믿고 의지하고 자신은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였다. 그 공통된 주장은 ‘하나님이 너무하시다.’ 할 만큼, 스스로는 한다고 했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정작 하나님의 참 사랑하심을 보지 못하게 한다. 성경은 그렇게 단언하셨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이를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우리 곁에서 사탄은 여러 방면으로 제안을 한다. 너무 교묘해서 광명의 천사 같다. 저가 훨씬 보람도 있고 행복감도 더한다. 그러니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오늘 시편의 기도는 그 해답을 준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 80:17-18).” 우리로 소생하게 하셔야 우리가 주의 이름도 부른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9).” 결국 그렇게 새 생명을 얻어야 예전의 생활과는 다른 삶을 경험한다. 보는 것이 다르고 보려고 하는 게 달라진다. 들리는 게 다가 아니고 들으려는 게 전혀 달라졌다는 것을 안다. 관심이 완전 다른 것이 되었다. 전에 그처럼 연연해하던 것들로부터 놓여난다. 더는 세상에서 질척거리지 않는다. 누가 어찌 생각할까? 나를 뭘로 볼까? 하는 따위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이는 놀랍게도 확장한다. 단지 오늘의 변화가 아니라 영원한 날까지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자라가라! 심지어 나도 나를 만족스러워하지 않는데도 그러는 나를 이제는 개의치 않는다.
주변의 여러 일들을 돌아보고, 내 안에 이는 수만 가지의 염려와 근심에 있어서도, 그러면서도 주를 의지한다. 달리 나는 더 좋은 수가 없다. 그것으로 오히려 감사하다. 마치 혈루증을 알던 여인처럼 더는 다른 길이 없다. 두 사람의 맹인처럼 곁에서 누가 제지하고 욕을 하든 말든 부끄러워할 처지가 아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마치 악, 소리나는 절규는 누구 눈치보고 어쩌고 할 게 없다. 살만할 때는 못한다. 자존심이 있고 나름은 체면이 있는데, 다들 보면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살만하여 대놓고 부르지를 못한다. 그런 마음을 위로하러 오신 게 아니다. 세상적인 것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여력이 있는 한 사람들을 개의치 않고 예수의 옷자락을 만질 수 없다. 예수여! 하고 부를 수 없다. 그러느니 가족들과 여행을 가고, 자신을 위로하려 고가의 물건을 사고,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지레 자기 나름의 방식을 모색하고 그에 걸맞게 의식을 갖추는 것이 종교심이다. 겁먹고 포기하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조차 숨긴다. 희한하게도 저는 아직 의지할 구멍이 있었다. 우리의 고집은 바닥을 쳐야지, 믿는 구석이 있어서는 '혹시나' 하고 뭉개기 일쑤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나름의 여력이 자신을 뭉갠다. 뭉그적거리는 영혼은 감정적이다. 좋을 땐 좋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싫을 땐 너무하다 싶을 뿐이다. 누구를 생각하다 저의 모습이 여전한 데서 그의 열심이 그를 삼켰다는 생각을 했다. 듣다보면 너무 열심이다. 교회 일을 무슨 막노동하듯 끼니 벌어 먹고 사는 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니 사느라 사는 게 고역인데 주의 일까지 더해져 믿는 일이 죽을 맛이다. 이상을 꿈꾸고 즐거움을 상상하는데 말씀대로라면 그 길이 묘연하다. 그런 이의 특징은 뚜렷하여 이상하게도 그런 교회만 만난다. 그런 자리만 맡는다. 그런 부류의 신자들만 꼬인다. 그래놓고는 그런 것들 대문에 억울하다. 하지만 실은 ‘그런’이 저였다. 부당한 조건이 실은 조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였다. 성경은 강조하시길 주의 계명이 무겁지 않다고 하시는데 저는 천 근 만 근 무겁다. 주의 멍에는 가볍다고 하는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주께서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가 엉뚱한 걸 짊어지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이는 기본 전제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2).” 곧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3).”
누구의 사연으로 마음이 쓰이더니 그것으로 나를 돌아보게 하심이었다. 유난히 이번 주간은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데 힘이 들었다. 월요일부터 뼈대를 잡고도 갈피를 잡지 못해 힘들어했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나는 과연 그러한가? 하는 데서 실타래가 풀리는 듯하였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 단호할 필요가 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인생이 아니다. 사역도 아니다. 감정적으로 질질 끌려간다고 해결될 일은 없다. 그러느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5).” 모두 주께 맡김으로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것들로 족하다. 주가 이미 책임지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1).” 내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다 해도 주가 나를 돌보신다. 나는 다만 주를 시인할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40).” 주만 바라고 주의 말씀만으로 의지하자.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 주께 향하여 기도할 따름이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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