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22:3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편 92:12-13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 되신다.’ 보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 종교인들이다. 산 줄 아나 죽은 자들이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같다.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말씀을 앞에 두고 환상과 기적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다. 저들에게는 소망이 없다. 우리에게는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3-14).” 이는 곧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실은 자신의 신념과 아집이 왕 노릇하는 사람들. 스스로의 앎과 열심을 다해 주를 찾고 바라고 의지하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의 속성 가운데 이와 같은 마음은 같이 존재하여서, 우리 안에 신앙과 종교적인 행태가 같이 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3).” 하는 바울의 심경으로도 알 수 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 그러므로 종교인들은 세상에 가진 것을 악착같이 지키려 하고 다른 세상을 관념적으로나 안다. 이 땅에서의 이상과 현실을 혼동한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는 것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3).” 나의 몸이 요구하는 것과 날마다 싸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를 가만히 묵상하는 데 있어 하루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일깨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과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는가? 붙든 것으로 족한 줄 알지 못하는 경우 한 날 한 날의 삶이 고단하기만 하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다 죽는다. 하루하루 죽어간다. 어떤 형태로든 늙어가고 병들어가며 홀연히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늙으신 부모를 곁에서 보며, 저들의 병듦과 지난한 현실의 파장이 누구의 것이 아니라 곧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는 데서 교훈이 크다. 싫든 좋든, 인정하든 부정하든 우리는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질 존재이다. 이미 죽었던 나로 살리신 것을 믿는다면 한 날 한 날의 일상에서 큰 미련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나는 요즘 이 말씀을 자주 읊조리게 된다.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산다는 것.’ 즉 건강은 물론이거니와 돈이며 명예며 그 어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놓여나서 사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능하다. 헨리 스쿠걸의 책 제목과 같이 <사람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로 영생을 살고, 사모하게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를 알게 하는 것이 고난이다. 내가 어려워하는 나의 문제들로 인함이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이를 달갑게 받을 사람은 없다. 누구나 고난을 원하지 않고 달콤하고 평온한 삶을 원하지만, 그러할 때는 모두 안이하여서 해이한 영혼으로 풀어지게 돼 있다. 이게 우리의 본질적은 속성이고 바울도 이를 두고 절규한 것이고, 다윗도 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 고로 오늘의 고난이 우리로 가르친다. 일깨우고 이끄신다. 더욱 깨어서 기도하게 한다. 말씀 앞에 앉히고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신다.
이 원리는 어쩌면 아주 간단하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 이를 위하여 주님이 오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그러니 누구라도 마음의 고통을 자신만 안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잠 14:10).” 누구의 어려운 형편을 누가 대신 짊어지고 나눌 수 없다. 저가 어찌 고난을 당하는가, 궁금해 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1-2).” 마치 남의 어려움을 보며 어쩌다 저러는가, 하고 궁금해 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다. 덧붙여 이를 판단하고 규정하고 정죄하는 자에 대하여는, 그의 말 값이 너무 참담하여 뭐라 하기도 민망하다. 특히 나는 목사라는 사람들이 강단에 서서 말씀 외의 것을 두고 갑론을박 하는 꼴이 너무 무섭다. 저의 정치철학이나 진영논리가 어떠한지에 따라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말씀 선포가 두렵다. 이를 두려워하면서부터 나는 가급적이면 예시나 인용도 피한다. 말씀만 전하는 데서는 미덥지가 않아 저가 더 강조하려고 보태거나 과장하려 할 때 이런 사단이 난다.
그러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주셨던 것'인데, 이를 정치적으로 또는 ‘선한 사업’을 강조하며 추진하려는 목적으로 예배를 종교화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나는 치를 떤다. 정부나 정치에 대해 특히 설교 중에 언급하는 일을 목사는 삼가야 한다. 누구의 어떤 슬픔이나 고난에 대해 누구도 함부로 예단하고 속단하는 일을 금해야 한다. ‘이는 누구의 죄 때문인가?’ 하는 궁금증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늙어가고 곧이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올바른 처신은 무얼까? 고대의 농부들은 농작물이 익어갈 때 처음 익은 열매 곧 맏물을 맛보고 그 해 농사의 승패를 가늠했다고 한다. 오늘 한 날의 첫 시간, 말씀 앞에 앉을 때마다 나의 마음이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수시로 자신을 돌아보아 누구의 고난당함을 보며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한다. 경건함으로 어떤 위로와 격려에 앞서 주께 가만히 근신하는 자세가 우선해야 한다. 모두는 하루하루 죽어갈 뿐이다. 인생이란 그 자체로 허망한 것이다. 그 가운데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곧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무엇 때문에 역경을 겪는 것일까? 누구의 죄로 인함일까? 하는 헛된 생각은 망상보다 위태롭다. 이에 따른 판단은 우리를 종교화하여 ‘뒤로 물러가게 하는 일'을 자초한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39).” 누구의 어려움이 저만의 독특한 일이 아니다. 남다른 죄 때문도 아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아 구원함에 이르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 알고 경건함으로 받는다. ‘나의 영혼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은 나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신다. 이런 경우가 맞는가 모르겠는데… 한참 때, 그러니까 내가 참 겁 없이 함부로 살던 때에 멀쩡하던 친구가 느닷없이 실명위기에 처했다. 이를 치료하느라 썼던 약물의 부작용으로 양쪽 고관절이 괴사하였다. 두 쪽 엉덩이에 인공관절로 심어야 했다. 저는 갑자기 닥치는 환난으로 느슨하던 저의 아내의 신앙이 경각심을 회복하고, 저를 이끌고 교회를 갔다. 같이 예배를 알아갔다. 물론 수술은 잘되었고, 눈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그런데 ‘도로아미타불’이 되듯 옛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그때 저를 보면서 내가 겁을 먹었다. 인생의 허망함을 알았고, 주님! 하고 주께 향하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물론 지금 저는 신앙을 지키며 주를 배워간다.
고난이 유익하였다는 시편의 고백이 과장된 게 아니다. 우리로 더욱 간절하게 하고, 안이하였던 자신을 두고 변증하게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은 유익하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전에는 그저 대충 그러려니 하고 여기던 것들에 대하여 얼마나 이제는 신중하고 감사하고 그 가운데서 참고 견디게 하시는가? 그러한 가운데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시는 말씀을 붙든다. 누가 겪는 아픔이나 슬픔을 보다 보면 내가 먼저 질식할 것 같지만 나에게 두시는 시험은 그러하였다. 어려움이 결코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셨다. 도리어 그것으로 주를 바로 알게 하셨다.
나의 하루, 오늘은 비가 오려는지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서 파스를 덧대고 앉아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인 게 감사할 따름이다. 누구에게 이 말을 어찌 말해줄까, 하다 나는 그저 주의 이름을 부른다. 문득 문득 저를 생각하면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을 바란다. 기어이 저의 어려움이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긍휼하심 앞에 감사와 영광을 올리는 계기가 되어줄 것을. 우리 안의 믿음은 우리도 알 수 없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데, 먼저는 진리를 인정하게 한다. 다음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주의하는 것이다. 말씀은 듣는 것이 아니라 사는 일이다. 일상에 스미는 말씀에서 새 힘을 얻는 것이다.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그러므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성경은 어려운 게 없이 단순하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우리 안의 종교성 때문이다. 의식화하고 이를 당위적으로 받으려는 데서, 자신이 무언가를 꼭 해야 할 것 같이 군다. 우리의 구원과 영생에서 우리가 할 일은 없다. 다만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들러붙는 군더더기는 내 안의 의식 때문이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 22:32).”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신 것에 주목한다. 이를 시편은 시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시 92:12-13).” 그게 무슨 나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뜰 안에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14-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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