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3:39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편 93:5
마다할 때에 주는 숨으신다. 스스로들 당장의 이득을 위해 눈 먼 자로 산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 소위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일컬어지는, 남들에게 보이는 종교적인 삶은 스스로도 속이는 위선이다. 예수님은 저들에 대해 명료하게 정리해주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3).” 말만 번드르르한 삶은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4).” 그러니 종교적인 삶이란 게,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5).” 겉은 엄숙하고 모양은 그럴듯하다. 그 속내는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6-7).”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중 받는 것으로 족해한다. 우리 안에 있는 종교적인 요소는 다를 게 없다.
말씀 앞에 공연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런 대목에서 나는 안 그렇다고 감히 말할 수 없어 찔린다. 은연중에 누가 알아주면 좋아하고 내 안에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기름 낀 그와 같은 마음을 걷어내기까지 말씀은 나를 부끄럽게도 하시고 송구하게도 하신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11).” 누구를 위하고 섬긴다는 일이 좀처럼 쉬운 게 아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2).” 알면서도, 그 와중에 높임을 받고 싶은 마음이 내재되어 있는 나를 본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13).”
누구와 통화를 하다, 저가 자꾸 울자 마음이 아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얘졌다. 전화 저편에서 간간히 들리는 숨소리만 마음을 저미게 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자꾸 전화를 해대는 아버지나 엄마 때문에 짜증이 나. 짜증을 내고 뭐라 퍼붓고 나면 내 속이 더 뒤집혀. 그런데 그게 나를 더 비참하게 하는 것은 운전하고 오고 가는 길에 찬양을 들으며 위로를 얻는데, 감사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악마처럼 변해서 내 신세가 서러워. 띄엄띄엄 이어지는 저의 말을 나는 가만히 듣기만 한다. 전전날에는 부친의 치매 검사와 식사 때문에 두 시간을 운전하여 인천을 다녀갔다. 전날에는 교통사고로 입원한 신랑이 회사 일로 더는 누워 있을 수 없어 조기 퇴원하기로 해서 하루 전에 미리 짐들을 챙겨오느라 바빴다. 어제는 엄마 병실을 옮기는 문제로 다시 두 시간을 운전하고 인천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 건 힘들지 않은데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서 혼자 집에 있는 아버지는 푸념을 늘어놓다 윽박지르고, 끝도 없이 말을 잇는 엄마는 똥오줌을 받아내야 하는 처지에 우울증이 심해져서 울다 웃다 서러움을 토로하는 것을 들어주다 지친다. 대략의 상황만 듣는데도 나는 내가 지쳐 숨이 턱, 하고 막힐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놀라운 고백 하나,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게 느껴져! 온통 현실은 ‘죽겠다’는 부정적인 함정뿐인데, 내 안에서는 알 수 없는 평안과 위로가 있어. 다른 하나는 힘들어 죽겠다고 하면서도 견딜만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느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를 아는 자의 여유와 믿는 자의 의연함은 자신도 놀라게 한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 내가 어찌? 하고 낯선 자신의 알 수 없는 마음과 대처능력에 놀란다. 나는 저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그 와중에도 풋, 하고 웃었다. 웃지 못 할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로 웃게 하신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것! 목사가 되고 주로 듣는 말이 기도해주세요, 하는 부탁과 기도할게요, 하는 권면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저를 생각하며 주를 바라는 것이다. 누구보다 나는 기도의 빚으로 사는 사람이다. 이는 사랑의 빚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저이한테도 말했고, 그럴 때마다 전율하는 기억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나는 소아마비 수술을 여수 애양원병원에서 받았다. 나환자촌으로 그 안에 애양원교회가 있고 순교자 손양원 목사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서너 달 그 곳에 있느라 중학교 입학을 한 해 미루었고, 나름 정이 많이 든 곳이다. 보면 하나님의 일은 그 과정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실은 나병환자의 외모는 혐오스럽고 두렵기가 이를 데 없다. 뒤틀린 몸뚱이와 얼굴, 손가락이며 사지육신 어느 것 하나 제대로인 사람이 없다. 나는 그때 고작 열세 살 아이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진 병원이 소아마비 수술로 유명해서 알게 된 것인데, 이듬해 아버지가 새로운 사역지로 가게 된 교회가 경기도 양주에 있는 나환자촌이었다. 앞서 서너 달, 저들로 익숙하게 하시더니 그후 삼 년을 살며 나는 저들의 외모에 위축되지 않았다.
하여튼 거기에 소경 장로들이 열한 분 있었는데 저들은 모두 성경 66권을 암송한다! 나병으로 몸뚱이가 만신창이가 된 것도 모자라 두 눈을 잃은 자들이 죽기 살기로 의지한 것은 말씀이고 이를 들으며 달달 외우고 암송하는 힘으로 산다. 또 하나 저들의 강한 힘은 중보다. 매일 기도 모임이 있는데 자신들이 알고 기억하고 나누었던 이름 하나하나를 거명하며 함께 기도한다. 이듬해 나환자촌으로 들어가 생활을 한 게 삼 년. 이후 아버지는 인천으로 개척을 하고 나오면서 나는 어디 외따로이 떨어진 것 같은 낯선 경험을 했다. 그쯤이었다. 어쩌면 고 일 때? 병원에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서 완행열차를 타고 여수 애양원으로 갔다. 새벽에 도착했을 때 가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슬그머니 교회로 들어갔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소경 장로들의 기도모임이 한참이었다. 맨 뒤 구석자리에 앉아 나는 병원 문을 열 때까지 엎드려 잠을 청했다. 그때 아버지 이름과 우리 교회 이름을 거명되는가 싶더니 또렷하게 내 이름 석 자가 들려지며, 날 위한 기도가 예배당 안에 왕왕거리며 울려 퍼지는 게 아닌가!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마치 누가 연출을 했어도 그처럼 타이밍이 절묘할 수는 없다. 하필 그 시간에 마치 내가 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처럼 합심하여 기도하는데….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것.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엄청난 영적인 힘이 있다. 그때는 잠시 전율하고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겼던 일이 이처럼 두고두고 나의 감동이 될 줄은 몰랐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오늘의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었던 유일한 끈은 날 위해 기도하는 가족은 물론 누군가의 덕분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누구에게 이런 소릴 하는 까닭은 우리의 사귐이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누림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누구를 위해, ‘기도할 게!’ 하고 말해주는 일은 빚진 마음으로 받는다. 잊고 있기 마련이어서 얼른 저의 이름을 적고 간단한 상황을 메모하여 붙인다. 우리의 기도는 과업이다. 저는 통화를 하다, 그 알 수 없는 힘의 원천이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것에 감격하였다.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울면서 운전하는 저에게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 훌쩍이며 들려주는 사연으로 벅차서 연신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었다.
이는 참으로 놀랍다. 그 단단하고 완고한, 바위 같았던 나의 고집과 아집을 깨뜨리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신념과 고집의 골수를 쪼개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그리하여 비로소 알게 된다. 이 모든 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3).” 더는 헛된 것에 얽매이고 끌려 다니지 않게 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다시는 사람 따위를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누가 날 뭘로 생각할지, 누가 날 뭐라 여길지,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오전에 저와 통화하며 덩달아 마음이 어려워 훌쩍거리는 것이 하루 일찍 설교 원고를 작성하게 하였다. 보면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말씀을 본다. 일주일 내내 설교 원고 하나 작성하는 게 일이다. 이를 위해 책을 읽고 누구와 대화하고 어떤 생각을 메모했다가 이처럼 전날의 사연을 가지고 말씀 앞에 앉아 묵상글을 쓴다. 한 편 한 편의 묵상글이 모였다가 설교 원고의 기틀이 된다. 모름지기 일상과 상관없는 복음은 없고 삶과 직결되지 않은 말씀은 없다. 오늘 본문에서 여러 번 경고의 음성이 울린다. “화 있을진저!” 이것이 어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만의 일이겠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마나 기를 쓰고 살았던가! 누가 신학을 공부하고 신대원을 끝내어 목사가 되려 했다. 목사고시에 앞서 실습이 필요하고 실전에서의 전도사 생활이 필요한데, 어떤 장애인지 저에게는 장애가 있었던 모양이다. 13곳에 지원 원서를 넣었는데 6곳에서는 정확하게 저의 장애로 인해 어렵다고 통보하였고 나머지 곳들은 딱히 이유도 없이 저를 받아주지 않았다. 지도교수들이 어찌저찌하여 졸업은 하게 된 모양인데, 실습 때와 같이 전도사로 실전에 들어갈 교회가 없었던가보았다.
저의 사연을 누가 읽고 들려준 것인데, 나도 찾아보다 그만두었다. 결국 낙향을 하여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로 일단락되는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그런 기사 내용을 누가 말하는데 나는 안타까웠으나 휘둘리지는 않았다. 저마다 모든 인생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 하나님이 저를 어찌 인도하실지 알 수 없으나, 나 또한 목사고시에서 두 번 떨어졌을 때 밀려드는 실의는 구차하였다. 말로 열거하지 않아도 그때의 심정은 뭐라 말하기 어렵다. 세 번째 응시를 하고 갔을 때, 공교롭게도 두 번 다 면접관으로 들어왔던 나이 지긋한 목사는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알아보았다. 이 일을 어떤다? 하는 얼굴이었다. 그때 내 안에 어떤 권능이 그런 소릴 하게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난처해하는 면접관들에게 너무 어려워하지 마시라. 하실 일을 하면 된다. 나는 내년에 다시 오면 되고, 남은 생을 이렇게 목사 고시만 치르다 마친다 해도 괘찮다고 말하였다. 이는 결코 객쩍은 소리나 객기어린 말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나야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누구처럼 관두고 낙향할 곳도 없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느니, 이러다 죽는 게 낫다는 심정이었다. 오늘 나의 목회현장도 그렇다고 하면 좀 우스운 소리가 될까?
별로 하는 일도 없고 매일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은 일상이지만, 그러니 더 나은 무엇을 위해 애쓰고 수고할 종교적인 여력이 내게는 없다. 부러 하나님이 또 그리 막아두시는 것도 같고, 어쨌든. 어떤 마음으로 그와 같은 기사를 내게 들려주었는지는 알겠는데, 나는 그런 얘기 또한 별로 개의치 않는다. 장애가 뭐? 재벌 총수로 살다 감옥에 가는 인생도 있고, 전직 두 대통령이 사면을 구걸하며 옥살이도 하는 판국에. 몸뚱이 멀쩡하고 돈 좀 있고 능력이 출중하니 뭐 좀 남다른 세상을 사는가? 나는 어릴 적, 여수 애양원교회의 소경 장로들을 존경한다. 저들의 그럴 수밖에 없었을,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이 성경 66권을 달달 외우고 암송하기까지 저들의 절박하고 절실하였을 ‘어쩔 수 없음’을 사랑한다. 한 날의 수고로 족한 것이다. 이내 예수님은 화인 맞은 양심으로 외식하는 자들을 두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9).” 다시 말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의뢰할 수 있는 나의 '어쩔 수 없음'의 오늘은 존귀하다.
이에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시 9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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