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46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시편 95:1
하나님을 어찌 다 알까? 어찌하면 주의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며 살까?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다들 각자의 하나님으로 벅차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며 사는 삶이란 개별적이면서 전체적이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부를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모세가 그토록 하나님을 보기 원할 때도 간신히 그는 주의 등만을 보았다. 이는 우리의 한계지 하나님의 한계가 아니다.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크기를 헤아릴 길 없다. 각자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처한 상황에서 보이시는 일부만으로 마주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보는 하나님은 끝까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자신과 아내는 늙고 경수가 끊겨서 더는 ‘약속의 씨’를 기약할 수 없는 때에도 저의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시었다.’
다윗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상대할 때 그 대적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이셨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그러나 또 저의 하나님은 6백 명의 무리와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늘 사망의 골짜기로 다니는 길이었고, 굶주림으로 그때마다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 전문
저의 하나님은 ‘내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반드시 나를 따르’는 것으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는 것을 날마다 체험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뿐인가? 욕정에 이끌려 밧세바를 범하여 죄악에 빠졌을 때는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하고 주께 아뢰며 용서를 빌고,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 구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각자의 시대를 살며 저마다의 굴곡 가운데서 처한 상황과 형편으로 하나님을 알았으나 그 하나님은 개별적이지 않으신, 전능하신 만유의 주 하나님 그 한 분이시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것이 전부가 아닌, 더욱 광활하고 무궁하신,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었다. 이에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시는 말씀으로 저들 각자의 하나님을 가지면서 붙들고 그 이상의 것으로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믿고 있었다(히 11:39-40).
누구의 어떤 사연이 또는 고백이 때론 일시적이고 한정적이어서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구하며 사랑의 주를 바라지만, 그것은 일부이면서 전부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보이시나 우리는 주의 등만을 간신히 보고도 그 얼굴에 광채가 나서 숨길 수가 없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 34:29).” 그러니 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나는 늘 은연중에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더해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나의 한계를 잘 아는 까닭이다. 됨됨이는 물론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는 감당하고 살 수 없는 말씀이라,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나를 두고 나에게는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만이 전부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살면서 누구를 건사하기는커녕 나 하나조차 바로 하며 살기 어려운 터에,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하시는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붙들고 산다.
그래서 각자는 그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하나님을 알고자 하여, 그 이상의 하나님을 묵상하며 경외한다. 그럼에도 내 안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모시기 싫어하는 속성도 있어, 빛이 비추이면 어둠으로 숨기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우울감이 휘돌면 순식간에 나를 합리화하며 나의 죄의 속성을 옹호하려 들기 일쑤다. ‘이만하면 됐지…’ 하는 억울함으로 호소하게도 된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은혜 위에 은혜’를 구한다. 갑절의 은혜가 아니시면 나는 구제불능이라, 나의 나 된 것을 내가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은 너무도 크시고 넓으시다. 아, 내 안에 정직한 영을 부으시고, 우슬초로 나를 정하게 하지 않으시면 나는 나의 더러움으로 질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자의적으로 하나님을 알려 하고, 분석하고, ‘안다’고 여기는 나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단 줄 알고 섬긴다. 가족과 같이 있으면서도 ‘은둔형 외톨이’처럼 내 안에 갇히는 꼴이고, 무슨 ‘수도승’처럼 삶을 구도하는 자세로 남을 평가하며 높은 담장을 치는 꼴이다. 또는 자기만족으로 ‘낙타털옷을 입고 광야에 머무는 것’처럼 독특한 나만의 신앙을 고수하려 든다. 어제는 문득 외따롭다고 느끼면서도 가족들과 있으면서도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토요일은 오전은 다소 느슨하여서,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았다. 앞서 <미안해요, 리키>를 보면서도 그렇게 혼자 앉아 펑펑, 울었는데. 혼자 울다 여러 번 나는 주님, 하고 신음하듯 주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저들이 안타까워서 눈물을 훔치는 것인지 나의 감정이 지나치게 이입되어 내 이야기 같아서였는지, 어쩌다 다들 사는 게 참 척박하고 어려운 처지여서 울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도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이면서 에베소교회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한 것일까?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우리가 함께 알기를 원하고 깨닫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이 더욱 더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대체 무엇으로 사는가?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의 기본 취지가 무엇인지, 어떤 목적으로 쓰였는지 성경은 밝히신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곧 믿게 하고, 그 믿음으로 생명에 들어가게 하려!! 천국은 마치 다섯 명의 승기로운 처녀와 같이 신랑을 맞으려고 등불을 예비하는 것과 같았다(마 25:1-12).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 이는 매우 급박하면서 절체절명의 진리다. '궁지에 몰려 살아날 길이 없는 사람들.' 산다는 데 따른 본질적인 질문을 저 두 편의 영화는 던지고 있다. 울컥, 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 일이 아니다. 기어이 살아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아니면 금세 진리와 비진리가 혼용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신약이 뒤엉겨 (토마스아퀴나스의 <신약대전> 같은) 모호한 기록에 함몰될 수도 있다. 그렇게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것들이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그러니 더욱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9).”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각각의 개별적인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며 사는 것 같으나 이는 모두 하나다. 우리의 한계이면서 전부이다. 나의 하나님은 수천년 전 다윗의 ‘구원의 반석이’셨던 그 하나님과 동일하다. 오늘 나로 딛고 설 자리가 그의 자리와 다르지 않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그러므로 내 안에 드는 여러 오만가지 잡생각보다, 오직 하나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2).” 왜?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4).” 아무리 형편이 어떠하다 해도. 그래서 오늘의 처지가 어떻다 해도. 모두는 그의 손 안에 있었다! 이 모두는 주의 것이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5).” 저는 나를 돌보시고 나는 그의 음성을 듣는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7).” 그러므로 나는 다만 무릎을 꿇는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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