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전봉석 2021. 1. 23. 06:06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태복음 24:42, 44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시편 94:17

 

 

모두는 말세를 산다. 저마다 그때를 알 수 없다. 주어진 날은 한정되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종말론적인 사고가 우리로 바로 설 수 있는 기회를 더한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는 오늘 본문의 경고가 큰 소리로 들리는 것 같다(마태복음 24:42, 44). 무드셀라를 낳고 에녹이 그러하였을 테고, 무드셀라가 죽던 날 노아의 홍수는 비로소 이루어졌다. 시대마다 말세이었다. 가만히 이를 묵상하면 시편의 고백이 가슴에 닿는다.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시 94:17).” 그때마다의 증거가 있었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8-19).” 주로 인하여 경각심을 갖고 주와 더불어 맡기신 종말을 사는 일은 복되다.

 

악은 참 교묘하고 악착같다. 언제부턴가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의 위선은 스스로도 감쪽같다. 오죽하니 마틴 루터는 “점잖게 죄 짓지 말고 차라리 대놓고 담대히 죄 지어라.” 하고 시대를 향해 역설하였다. ‘n번방’ 누가 16년 실형을 선고 받았다. 모 운동선수 코치가 지속적인 성폭행으로 10형은 받았다. 정치권에서는 형이 너무 가볍다며 질타가 이어졌다. 양부모 입양아이 사망 소식에 사람들이 공분하여 계란을 던지고 호송차량을 가로막고 그 앞에 절규하며 눕기도 하였다. 다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지. 그러한 기사를 보다 루터의 말 뜻에 수긍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감히 나는 아니라고 말하며 그 말을 감당할 수 있을까? 쓸려 다니는 안개처럼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것처럼 짙게 내려앉았던 가책이 언제 그랬냐는 듯 걷히고 나면 태연자약할 따름이다. 호들갑스런 감정과 쏠리고 쓸리는 마음의 일에 환멸 한다. 그때마다 자신들은 자기 죄를 합리화한다. 저마다 이유가 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기들의 변명이 따른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 이를 다소 무마하려, 자신을 겨누던 총구를 사회로 향해 겨눌 뿐이다.

 

그래놓고는 저마다 자신의 결단을 신봉한다. 스스로 자기 죄를 가볍게 여기는 처사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거룩은 삶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고백도 결단도 자신의 믿음도 살아 꿈틀거리지 않으면 죽은 게 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7-18).”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의 믿음은 증명돼야 한다. 무엇으로 나의 관심은 쓸려 다니는가. 말로야 누군들 못할까? 남을 비난하기도 자신을 자책하기도 쉽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6).” 그러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

 

기사는 자극적이고 사람들의 감정은 그때마다 출렁거리듯 몰려다닌다. 그러나 정작 개개인의 말세는 무엇으로 대비하고 사는지. 미국의 대통령이 바뀌고 트럼프가 물러나는 장면을 보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였다. 고작 4년, 길어야 8년. 이를 두고도 저토록 권좌가 영원할 안 것일까?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우리의 종말도 이와 같다. 죄는 잘 숨는 법이다. 다른 불편한 것으로 자신을 가린다.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성경도 제법 인용하고, 좋아하는 구절은 암송도 한다. 의무적으로 읽고 적용한다. 그러면서도 천성적으로 우리는 어둠을 추구한다. 나는 종종 어떤 기사를 보다 그와 같은 사실 앞에 공분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더 경악한다. 루터의 말처럼 차라리 대놓고 악을 범하시라. 마치 자신들은 아닌 것처럼 총구를 겨누는 꼴이다. 누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지. 정작 자신들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까?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었다.

 

성경의 절규가 가슴을 가격하는 것 같다. 나는 얼마나 정직한가?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 51:6).” 천하의 다윗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담장 너무 음욕이 동할 때, 어떤 굳은 의지가 이를 저지하였나? 죄보다 느슨한 게 없다. 아,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 우리가 스스로 어찌 정직을 회복할 수 있을까?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저의 위선적인 기도가 오히려 정직하게 느껴질 정도다. ‘주여, 나를 선하게 하소서. 그러나 아직은 기다려주소서.’ 사랑하는 정부(情婦)를 마다할 수 없는 이중적인 자신을 두고 괴로워하였다. 우리의 위선과 아집도 같다. 나는 생각이 많고 그러해서 주의 도우심만을 구한다. 어디로 피할 데가 없다.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시 94:22).” 하나님이 나의 전반적인 것을 다스리시면 안 된다. 어느 것 하나도 나는 감당할 수 없다. 무엇을 맡겨드리는 게 아니라 전부가 아니면 소용이 없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요즘은 아들애와 같이 하루를 보낸다. 종일 같이 있으면서 그렇게 내가 눈치를 본다. 그러지 말아야지 해도 쉽지 않다. 자책인지, 어떤 불편함은 나를 자주 흔들고는 한다. 차갑고 퉁명스런 아들의 말투에 나는 말을 찾다 만다. 시선을 피하고 마음만 어렵다. 어제는 같이 점심을 먹고, 가만히 침대에 앉아 있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런 걸 뭐라 말을 좀 걸고 다가가고 싶은데 마음만 어렵다. 아내는 너무 애달파하지 말라고 성화다. 마음 쓰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내 마음 같나? 그럼에도 같이 한 공간에 있는 시간이 귀하다. 은연중에 나는 자꾸 기도한다. 할 수 없으니 기도밖에 없다. 그리고 싫든 좋든 아들은 교회에 있는 것이고, 공부를 해도 종일 주의 전에 거하는 것이니, 주께서 알아서 하시라. 맡기고 또 맡긴다. 하고 싶은 말은 꾹꾹 눌렀다가 설교 중에 말씀으로 한다. 성령께 미룬다. 주가 하시라. 나는 할 수 없고, 본도 안 되고 덕도 없는 사람이라. 덕분에 오직 주만 바라게 하신다. 가만히 주를 바람으로 태연한 척 군다. 그렇게 다만 주를 바라는 기회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나이가 들고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워질수록, 누구의 병환 소식에 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주밖에 달리 말할 상대가 없다. 아니면 뒤죽박죽 쓸려 다니기 일쑤라. 안달복달 나를 볶아대는 마음으로 마음은 청결하여 간다. 청결함으로 더욱 주를 사모하게 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어찌 보겠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은 청결한 마음으로다. 청결은 볶이는 날과 비례한다. 쓸고 닦고 깨어있게 하신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13:15).” 무엇을 보고 어디에 시선을 빼앗기고 사는가. 무엇을 들으며 어떤 소리를 따라가는가.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16).”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안다는 것은 보지도 못하고도 보고 듣는 일이다.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 86:5).” 이와 같은 말씀을 앎으로 보고 봄으로 산다. 돌아보면 나를 주께 내어놓는 계기는 들들 볶는 마음에서부터였다. 내어드리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하는 마음, 제 무게에 겨워 나는 주체할 수가 없어서. 어떤 일로, 무슨 말에 또는 시선조차 나는 감당할 수 없어서 주를 본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면 지난날 아이 앞에서 내가 함부로 굴었을 나의 말과 시선이 마주친다.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 갇혀 에베소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 실은 저가 그토록 간절하였던 것일 테고, 오늘에는 나를 위한 것이 되어 내가 아들을 위해 해야 하는 기도가 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을 구하고 알게 하시기를. 일련의 사회사건이나 국제정세가 이구동성으로 일깨우는 것도 맥을 같이 한다. 주가 아니시면, 살 수가 없다.

 

이를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 빈 게 없는 마음으로 채우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알면 알수록 더 많이 알고 싶은 마음으로,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오늘 주님은 견딤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미혹당하지 않도록,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25).” 말씀만 붙들자. 나의 허무함을 주도 아신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시 94:11).”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음을.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14).” 이보다 더 강력한 보장이 어디 있겠나? 이에 나는 확신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17).” 고로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