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복음 26:75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시편 96:10
어쩌면 이 한 구절의 진술에 모든 이야기는 축약된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자신은 죽어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고는 부정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며 부인하다 닭 우는 소리에 뉘우친다. 호언장담할 때야 뭐든 자신 있을 테지만 정작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를 시편의 함의로 대하면,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시 96:10).” 주가 다스리시지 않으면 흔들릴 뿐이다.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주께 의지해서이다. 스스로는 어림없다. 기어이 예수를 판 유다도, 함께 주의 곁을 지키던 제자들도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6).” 이는 결국 성경을 이루려하심이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급박하게 돌아가는 ‘잡히시던 한 날의 일’을 묵상하며 여러 군상을 마주하게 된다. 예수를 어찌 잡을까, 궁리하는 사람들로 시작하여(-5), 그럼에도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때에 향유 옥합을 예수의 머리에 붓는 여인과 이에 자신들의 의로움으로 분개하는 제자들(-9), 이를 제지하시며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 여인의 그와 같은 행함이 앞서 예수님의 장례를 위함인 것을 일깨우시고(-1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3).” 즉 주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의 사실과 함께 여자의 행함도 기억되게 하셨다. 그런 와중에 결국 은 삼십에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16). 함께 성만찬 유월절을 준비하는 일과(-19), 저들과 앉아 식사하실 때 돌이킬 수 있었던 유다의 경우와 그의 제자들(-25). 저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며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게 하시고(-29),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30).” 어느 대목 하나마다 깊은 묵상이 따라야 할 것들이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던 여인과 은 삼십에 예수를 판 제자와 뿔뿔이 흩어질 제자들(-32). 그 가운데 베드로의 장담,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3).”
숨을 고르고 한 날의 상황을 다시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이미 다 아는 독자로 이 이야기에 접근하기보다, 그 자리에서 나는 어떤 역할로 있었을까? 생각하면 예수를 판 유다이겠다가 스스로 장담하는 베드로일 테고, 영문도 모른 채 갸우뚱하고 있는 제자들 중에 하나였을지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34-35).” 나는 이와 같은 대화에서 숨이 막히다. 그러한 나까지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르시는 것 같다. “내가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으라.” 하시고(37-38), “고민하고 슬퍼하사” 예수께서 숨기지 않고 말씀하신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38).” 이어지는 예수님의 기도를 듣는다(-46).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향하신 마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41).”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나는 무너지는 것 같다.
결국 예수께서 잡히시고 제자들은 도망하였다(-57). 그러나 그때에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58).” 어쩌면 우리의 문제는 이 한 구절에 다 담겨 있는 듯하다. 그 원인과 결과가 어떠한지까지 말이다. 저처럼 멀찍이서 구경꾼처럼 하인들과 있다가는! 더는 세상의 종이 아니면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끼어앉는 우리 경우는 결국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심문과 예수님의 의연하심, 그리고 베드로의 배신과 회개로 이어지까지(-75). 나는 요즘 ‘은혜 위에 은혜’ 곧 ‘충만하심’에 대해서 자주 묵상하게 된다. 오늘 말씀 속의 여러 군상들 가운데 은혜가 아니면 주 앞에 설 자가 과연 누구일까? 어찌 저런 것들을, 하필 그 중에 나 같은 것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빛이 왔으나 빛을 싫어하는 까닭은 여전히 어둠에 속하였기 때문이었다. 향유를 붓는 여인을 두고 의분하는 듯한 심정도 내 것이다. 모호하고 막연한 듯 진리 앞에서 이내 은 삼십에 예수를 판 유다도 나였다. 뿔뿔이 도망치는 제자들의 모습이나 멀찍이서 구경하듯 눈치를 살피던 베드로의 행색도 영락없는 나였다. 그러나 이내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것까지… 나는 어느 군상에도 있었고, 모두가 나여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이와 같이 내 안에 솟아나게 하신 샘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이와 같은 은혜로의 이미 ‘은혜 위에 은혜’가 아니었겠나? 그의 충만하신 은혜로 나는 오늘도 오늘을 산다. 오늘을 살다 영생을 맞이하는 것도 은혜 아니면 어림없는 일이다. 마치 나는 아닌 듯 가룟인 유다를 비난하지를 못하겠다. 베드로의 객기와 말뿐인 행색을 욕할 수 없다. 심지어 예수를 잡아 심문하고 때리고 조롱하는 무리들이 나였지 않았나? 나는 고개를 들 수 없는데,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하시는 말씀 앞에서 운다. 아, ‘왜 나를 사랑하시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돌아보면 변변한 게 하나도 없다. 지금이라도 부끄럽지만 향유를 들고 와 예수께 붓기를 바라지만.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나는 죽었었고 나는 죽었다. 죽었던 나를 살리셨고, 영원히 살게 하시려고 죽이신다. 이제는 죽었으나 살아있어서 이를 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서도 은혜밖에는 떠올릴 게 없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서부터 오는 마음이다. 이 아침 나는 자꾸 글쓰기를 멈추고 가만히 턱을 괴고 가만히 앉아 있게 된다. 자세를 바로 하고 주를 바란다. 아,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그러하기를. 부디 나의 남은 생이 더는 저들 뜰에서 하인들과 앉아 구경꾼으로나 멀찍이 있지 않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과연 그러할 수 있을까? 변덕스러운 마음과 어찌할 수 없는 나의 불안과 염려를 가지고,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3).”
아, 이제 나는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생명이 하나님의 안에 있다! 이를 앎으로 오늘 시편의 첫 구절에 닿는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시 96:1).” 나는 오늘도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한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2).” 한 날 한 날의 순간인데, 내 안에 이는 여러 군상의 다영한 모습 앞에서 나는 좌절뿐이다. 그러하지만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4-5).” 이에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6).” 그리하여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9).”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1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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