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가복음 4:23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편 102:26-27
말처럼 허무하고 소리처럼 무상한 것도 없다. 무상해서 가치 있고 허망해서 귀하다. 이를 ‘들을 수 있는 귀’를 따로 주셨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막 4:11-12).”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주셨다는 의미다. 소리처럼 흩어지고 말 것과 말처럼 더해져도 실상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셨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신 일이다. 이를 임의로 알 수 없어 조작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쓰려니까 왜곡된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3).” 나는 오늘 이 짧은 명제 앞에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귀를 막으시고 눈을 감기신 이의 뜻을 헤아리다, 오늘의 은혜가 벅차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 102:26-27).
우리는 얼마나 일시적이고 한정 된가? 그 가운데 말과 소리는 얼마나 사사로워서 가치로 칠 것도 못 되는데…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막 4:22).” 드러내심으로 숨기고 나타내심으로 감춰진다. 말씀을 오래 머금고 되새기면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21).” 빛이 오셨으나 어둠은 이를 싫어하여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숨는다. 자기 판단, 그 기준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 드는 것이다. 어둠에도 익숙하여져 눈이 있는 듯 서로 뒤엉겨 하나처럼 뒹군다. 일련의 사회 보도가 종종 안 됐고 불쌍하기만 하다. 결국 저의 학력은 위조였고, 말은 과장되어 자신의 소리가 더해졌다. 소리는 증명될 수 없어 무게로 칠 수 없으니 흩어지는 것도 붙들 수 없다. 모 선교단체 대표 목사의 이력이 도마에 올랐다. 또는 청문회 때가 되면 잘도 감추고 잘들 어둠 속에 두었던 것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저마다 변명은 가지가지다. 자신은 알지 못했다 하는데 그 말은 가소로워서 귀에 담을 게 없다. 또한 ‘노래방 도우미’들이 제한되었던 노래방 영업이 풀리면서 활개를 치고, 오후 서너 시부터 규제 시간인 아홉 시까지 세 탕 네 탕을 뛰며 밥벌이를 한다. 기사에 보니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서른여섯 살 주부는 그나마도 벌이가 생겨 자식들 먹일 수 있어 다행이라며 항변하였다.
저마다의 사정과 사연이 어둠 속에 섞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과 악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서로의 허물을 덮고 죄악을 은폐되어 적당한 말로 변명을 늘어놓다 흩어진다. 어둠 속의 그 일은 누구도 모르는 일이고, 모른다고 여김으로 조금은 덜 양심에 찔려 무뎌질대로 무뎌졌다 덜어낸다.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우리의 실상이 보란 듯 들추어지는 것 같아 민망하고 난감하다. 등불을 켜기 전에 누가 알겠나. 나도 거기에 있고 나도 거기에 있어 누구의 소리고 어떤 이의 말인지, 말과 말은 섞여서 헛되고 소리와 소리는 뭉치다 흩어져서 허망하다. ‘그래도 되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온 우리의 죄악됨을 들추시는 것 같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 102:28, 19-21)
부디 교만하지 말자. 정직하자. 물질은 섬기는 것도 누리는 것도 아니다. 곧 ‘얼마냐’가 아니라 ‘어떻게’로 보아야 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만고의 진리다. 그냥 학원 선생으로 신앙 지키며, 주신 데 따른 역할을 다하며 주를 사랑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였어도 좋았을 것을. 나는 저 선교단체 대표의 이상한 간증을 들으며 어이가 없어 숨을 죽였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곧 ‘땅에 있는 지체’는 마치 우후죽순 같아서 행여 비온 뒤 파죽지세로 자라나는 욕망과도 같다. 저의 안에 신앙이 종교심으로 더해지면서 자신을 마치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시는 것처럼 여겼다. 그 기회를 사탄은 잘도 붙들어 그에 부합하는 사람들의 허영을 결부시켰다. 채 5-6년 안에 저 단체는 어마어마하게 성장하는데, 자녀를 둔 부모의 적당한 종교심과 남다른 탐심이 결합한 결과다.
보도를 읽으며 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탄의 정교하고 멋진(?) 선방이 먹힌다. 그러니 부디 교만하지 말자. 정직하자.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8).” 적당하다는 것은 상대적일 수 없고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은 절대적이다. 신앙을 스스로 자신하면 신념이 되고, 자신을 쳐 복종시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된다. 신념과 신앙은 대척점을 이루고, 종교심과 신앙은 상대적이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예배를 예배하면 우상이 되고 믿음을 믿음하면 숭배가 된다. 예배를 예배한다는 것은 당위에 이끌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것에 가식이 더해지는 것이다. 비대면예배가 갖는 한계가 아무래도 그런 위험요소가 크겠다. 우리의 본질이 그리 선하지 못하다. 모니터 앞에서 엄숙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엄숙이란 우러나는 마음에서의 경건이지, 꾸며진 역할로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함’ 뿐이다. 오죽하니 어느 교회 광고창에 ‘설교만 듣고 끄지 마세요.’ ‘소리를 꺼두지 마세요.’ 하는 따위의 어이없는 주의 사항을 보았다.
말이란 그만큼 무게가 실릴 수 없고 소리란 그저 허공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하는 바울의 말과 소리로 전달되는 무게는 어째서 오늘 나에게도 한없이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는 것일까? 자신을 날마다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날마다 살아나는 것으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게 우리의 본성임을 알았다. 그럴 때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마음이 금세 빛을 가리려고 하거나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숨으려 한다. ‘코로나 사태’로 드러나는 교회의 참상은 잔인할 정도로 참혹하다. 뭘 그렇게 사람을 끌어 모으려 안달을 하는지, 이를 전도의 사명으로 둔갑시켜 자신들을 두둔하고 있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돌고 돈이 모이면 거짓이 지배하게 돼 있다. 돈은 어둠에서 생성되어 어둠에서 부풀려지는 법이다. 탈세는 아니더라도 절세를 위한 편법을 동원해야 하고, 적당히 숨긴 어둠은 이내 드러나지 않을 줄로 알았다.
그러니 어떻게 한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2).” 고로 우리의 가난도 사명이고, 어려운 질고도 은사였다.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더욱 무던히 주께로 나아가게 한다. 곧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17).” 아, 주가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신다면 가난이나 질고가 무슨 대수이겠나? 사람들이 외면하든 어쩌든, 묵묵히 나무를 가져다 다듬고 틀을 짜서 한 땀 한 땀 주어진 평생을 방주를 지었던 노아를 묵상한다. 왜? 우리에게는 들리는 귀와 보이는 눈을 주셨다. 눈은 봄으로 귀는 들음으로 복되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이와 같은 믿음으로,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2).” 뭘 보고 무엇을 듣고 있나?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그럴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 충성이란 무던함이다.
오늘 말씀을 묵상한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그리하여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24-25).” 하실 때에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시 102:1).” 나는 주께 고할 수 있다. 곧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2).” 이는 주가 내 소리를 들으시고 나의 말에 응답하실 것을 믿음이다. 때로는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7).” 그러나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13).” 고로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26-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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