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전봉석 2021. 2. 7. 06:0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4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시편 109:21

 

 

나 같은 것을 어찌 이처럼 귀히 삼으셨는가. 나의 아둔함과 연약함을 실감할수록 부끄러움뿐이다. 그래도 뒤를 돌아보는 일은 오늘의 주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때가 좋았는데, 하는 식의 태도로는 전진할 수 없다. 주의 영광을 결코 다른 것과 바꾸지 않으신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막 11:13-14).” 표면적인 내용은 억지스럽다. 철이 아닌 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 하신 것인데, 잎사귀만 무성한 것에 대한 징계다. 주의 영광은 가차 없다. 누구와도 무엇과도 나누지 않으신다. 다른 무엇도 용인할 수 없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다른 무엇으로도 아니다. 선을 행하고 나름의 의로움으로 더한다 해도 오롯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잦은 죄악은 무엇을 섞는 게 아닐까? 구제하고 헌신하나 그 안에 자기만족을 섞고, 누군가의 알아줌을 섞고, 인정받고 존중받는다는 위안을 섞어야 하는 자존감으로 산다. 그러므로 잎은 무성한듯한데 정작 열매가 없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문제를 문제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상식과 철학적인 판단을 섞어서 믿음 안에 두려는 것이다. 더러 설교를 듣고 판단하고 분석하려드는 성향도, 오늘 날 교회를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뭐라 비판하는 것도 그렇다. 정작 예수의 좋은 점-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도우심과 사랑에는 연연하면서 십자가는 외면하고 자신도 지려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 속에 팽배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이다. 나는 ‘무화과나무의 교훈’에서 이를 생각한다. 정작 그런 자들이 의외로 많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2:21).” 예수님은 이를 분명히 하셨다. 그리고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

 

정말 무성하게 많은 것 같다. 다들 주여 주여 하며 주의 일에 어쩜 그리도 열심인지 모른다. 선지자 노릇을 하고 누구는 권능을 행함으로 귀신도 쫓아낸다. 사람들이 저의 행사를 보고 이력을 살피며 모여들고, 교회는 부흥하고 사람들은 열광한다. 저의 적절한 쇼맨십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이지 정작 그 안에는, 예수께서 취하실 수 있는 열매가 없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그렇게 살다 결국 그러한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인데, 당연히 저는 억울하지 않겠나? 그러니 어떻게 한다?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를 결코 나누지 않으신다.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으시고 덧대지 않으시며 나누지도 않으신다. 그러니 여러 성자를 운운하며 예수 외에 다른 이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일은 무성한 무화과나무의 잎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아는 불교신자는 어찌나 그 성품이 온화한지 부처가 예수이고 예수가 우리 안에 있어 중생을 계도하여 모두가 보살이 된다고 한다. 누구는 아예 목사가 되고 교회를 하다 환멸을 느껴 깊은 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부처도 십자가도 온갖 대왕 신을 모시고 은둔을 한다.

 

그런 거 보면 사람이 참 요물이라. 영리하기가 그 어떤 피조물보다 월등하여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온갖 꾀를 낸다. 못할 게 없다. 더욱이 요즘은 사람들의 시선이 돈이 되고 권세가 되니 그야말로 별의 별 사람이 다 개인방송을 하며 지껄여대고 해괴한 짓을 다한다. ‘먹방’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에는 성인구독을 빌미로 정신지체 여아를 벗겨 방송을 하다 적발되기도 하였다. 실제 돈이 되면 뭐든 다 하는 시대다. 그러니 이런 사회적인 풍토가 아이들을 선동하고, 노인층과 청소년층이 유튜브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훗날, 그날이 되었을 때 정작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린다. 주님은 모르시는 삶이라니! 이것의 심각성을 히브리서 기자는 첫 문장에서 언급하고 있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다시 말하면 구약의 그 숱한 이야기는 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하실 말씀의 세계이다.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가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안다고 하고 저마다 예수 이름을 운운하지만 덧붙여서 성모 마리아도 찾고 여러 성인들도 좇으며 보태고 더하여 그 잎사귀만 무성하다. 잠시 더 덧붙이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3).” 고로 우리는 아들의 영광으로 산다. 모세를 논하고 다윗을 살펴보는 것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실은 다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로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 가운데 충만하신 그 충만하심으로 은혜 위에 은혜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 곧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를 아는 일이다.

 

우리가 힘써야 하는 일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부르심과 택하심을 힘써 굳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시대에 무엇을 위해 힘써 지키고 싸워야 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때문이다. 주를 알게 하시고, 주를 더욱 사모함으로 정작 우리가 얼마나 무성하고 화려하게,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무화과나무로 성장하느냐가 아니라 열매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어찌 얻을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나는 그리 받고 묵상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받고 못 받고는 내가 판단할 게 아니다.

 

우리의 몫은 받은 줄로 믿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으로 이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기도하고 구하는 것뿐이다. 돼도 않을 것 같은, 나는 늘 날 위해 기도하는 게 있다면 의연했으면 좋겠다. 인자하고 온유하였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조바심내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병적으로 실제 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견딜 수조차 없는 불안으로 힘겨워한다. 그러느라 때론 이성을 잃을 정도다. 감정이 상하고 슬픔과 우울감이 동시에 나를 휘몰아친다. 일일이 이유를 살피는 것도 구차할 정도이다. 다들 괜찮다, 하고 그럴 수 있다 하는 일을 두고 혼자 씨름하는 꼴이었으니,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시 109:22).” 그러니 어쩐다?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21).”

 

날씨 때문이었는지, 말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인지, 나는 어제 우울하였고 까부라져 입을 꾹, 다문 채 몸도 마음도 한없이 가라앉았다. 누구라도 건드리면 울어버릴 것처럼 의미 없이 TV를 보다가도 자주 눈물을 글썽거렸다. 왜 그래? 하고 누가 물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나의 연약함이 나로 주님만 찾게 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2-23).” 나는 산을 옮기는 일보다 나를 내가 다스릴 수가 없어서 무겁다. 그러한데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4).” 하여서 나는 나의 온유와 의연함을 두고 주께 아뢴다. 말씀을 사모하고 아는 만큼씩 나도 인자하여지고 평온하여졌으면 좋겠다.

 

 

아,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시 109:1).” 곧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4).”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