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41편 / 송축(頌祝)

전봉석 2021. 1. 21. 17:02

 

20200124 주일

 

 

시편 41편

송축(頌祝)

 

 

들어가는 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여기서 ‘하룻강아지’라는 표현을 ‘하루 된 강아지’로 읽으면 다소 의미가 떨어진다.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됐으니 아직 눈도 못 뜨고,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이니, 그런 것이 범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일 테고. 이를 ‘한 살 정도 된 개, 소’를 일컬을 때의 ‘하릅’으로 하여 ‘하릅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해야 의미가 산다. 알만한 게 겁도 없이 짖어대는 꼴이니. 앞서 속담을 먼저 언급한 데는, 오늘 시편을 준비하다 저들-악인들의 악담이나 빈정거림이 그와 같아서 하는 소리다.

 

이를 3연으로 나누었다. 1연(1-4절)은 우리의 ‘빈약함’을 주께 호소하는 모습이다. 2연(5-9절)은 그런 우리를 보고 ‘원수’로 지칭되는 저들-세상의 ‘악담’을 살폈다. 이에 3연(10-13절)에서 그럼 우리의 ‘반격’은 무언가? 하고 덧붙여 마지막 13절을 아예 4연으로 분류하고, 우리의 역설이 되는 ‘송축’으로 의미를 더했다.

 

 

1. 빈약(貧弱)

빈약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 경우다. 가난할 빈(貧)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의미이고, 약할 약(弱)은 충실하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시편의 첫 연은 우리가 빈약함으로 주께 호소할 때 우리에게 더하시는 은혜를 살피게 한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시 41:1).” 가만 보면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우러나서 돕는다.

 

첫째, 우리의 빈약함이 선행을 더하고, 그와 같은 선행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일이 된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둘째, 우리의 빈약함은 주의 보호와 치료를 받는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시 41:2-3).”

 

셋째, 우리의 빈약함은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먼저는 종말의 때를 준비하게 하고, 다음은 기다릴 줄 알게 한다.“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넷째, 우리의 빈약함은 거둘 것을 하늘에 쌓게 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정리하면 우리 성도들의 빈약은 우리로 정결하게, 성실하게, 올바른 길로 가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2. 악담(惡談)

유난히 말로 밥벌이가 되는 시절이다. ‘일인방송’, ‘너튜브’, ‘먹방’ 등 사람들의 관심이 돈이다. 조회가 늘고 그 횟수는 밥벌이를 초월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보다 자극적인 언사에 끌리고, 기꺼이 그와 같은 만족에 지갑을 열게 한다. 그런데 평소 우리의 말은 습관이고, 습관은 인격이고, 인격은 운명을 바꾼다. 오늘 시편 2연을 보면 악담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알려준다. 악담(惡談)의 악은 악할 악(惡)으로 말씀 담(談), 곧 고약한 말을 일컫는다. 이는 오랜 시간 쌓아온 저의 속성으로 영벌에 처할 것이다.

 

첫째, 악담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온다.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시 41:5).”

 

둘째, 악담은 미움을 토대로 하는데, 이는 살기어린 마음이다. 오늘 시편의 표현처럼,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면서 고의적으로 품고 있는 적개심이다(5).

 

셋째, 악담은 거짓을 기반으로 말을 옮기는 것이다.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6).”

 

넷째, 의도적으로 해하려고 꾀하는 비열한 짓이다. “수군거리고 해하려고 꾀하며” 꼬투리를 잡거나 확대, 과장, 비약하며 말을 지어낸다(7). 그렇게 저들은 우리가 “악한 병이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8).”

 

다섯째, 악담은 모의한다. 다시 말하면 저 혼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 남을 부추겨 선동함으로 함께 하던 사람들을 흔들어놓는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8).”

 

정리하면 선한 의도로 정보를 나누고 공유하려는 일인 방송도 있고, 그래서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경우도 있겠으나…. 대부분이 선동적이고 자극적이고 엽기적이며 극단적이다. 남의 말을 하는 경우는 진영논리에 빠지거나 종교화 된 신념으로 상대를 공격한다. 곧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그러니 늘 논란이 되면서도 ‘막장 드라마’가 시청률이 높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르뽀, 폭로 성 프로가 인기를 더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고 경고하신 바 있다. 그러했던 우리가 이제는 그 더럽고 추악하기만 하던 뱃속에서 생수의 강을 흘려 내보낸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훗날에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3).” 우리로 근신해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전하였다.

 

모름지기 욥은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욥 12:11).” 우리로 듣는 말을 분간해서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재미로, 웃자고, 남의 말을 함부로 옮기거나 지어내어서는 안 된다. 그런 거 보면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시 17:10).” 마치 먹고 할 짓들이 없어 그러고 사는 것 같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성경의 경고를 귀히 들어야 한다.

 

 

3. 반격(反擊)

저런 원수-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으로 반격할 것인가? 반격은 ‘되받아 공격하는 일’로 돌이킬 반(反)자가 칠 격(擊)자 앞에서 그 뜻을 전투적으로 받아친다. 이 의미를 우리도 전에는 다를 바 없는 자였으나 이제는 돌이켜 오히려 악담에 악담으로 응수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럼 우리의 반격은 어떤 게 있을까? 오늘 시편의 후반부는 이를 일깨우며 궁극적인 반격, 하나님을 송축하는 자리에까지 우리를 인도한다.

 

첫째,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고한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시 41:10).”

 

둘째, 주께 고하며 호소하다보면 되레 우리의 반격은 맞대응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저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이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가장 놀라운 경지의 사랑이다.

 

셋째, 그러한 힘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시 41:11).” 주께서 나 같은-빈약하고 보잘것없는 자를 기뻐하시는데 누가 뭐라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 있겠나?

 

넷째,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주가 나를 붙드시고 세우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12).” 도대체 나 같은 게 뭐라고 주가 나를 기뻐하시고, 그것도 모자라 나를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는 것일까? 이는 날 위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음으로까지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성부 하나님은 무엇보다 더욱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우리의 반격은 주가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저들과 맞서 대대거리며 응수하고 악담을 퍼붓는 게 아니라, 도리어 저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다. 그러는 것은 저가 좋아서가 아니라 저 또한 그리 두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아, 이 엄청난 반전이 우리에게는 숨겨져 있었다.

 

 

4. 송축(頌祝)

마지막 13절 말씀을 한 연으로 따로 두게 된 까닭은 송축이 곧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한자어로 봐도 칭송하고 기린다는 의미의 칭송할 송(頌)자와 기도한다는 의미의 빌 축(祝)자가 더해진 말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13).” 여기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아는 것처럼 성경의 ‘이스라엘’은 지엽적인 의미로 이스라엘 나라를 일컫는 게 아니다.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선민, 주의 백성으로 따로 구별하여 부르신 자들을 일컫는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의미한다. 다시 읽으면,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칭송하며 기원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다. 마치 명품 옷에 명품 가방을 들고 거리를 활보할 때의 발걸음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명품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하다못해 ‘군인 가족 명예 훈장’을 기리는 것처럼, 어느 유명인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도 으쓱, 하는 것처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이를 송축하는 일이 우리의 영예이고 영광이다. 하다못해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다 내려온 대변인도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삼고, 자기 인생에 가장 영광이었다고 칭송하는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칭송하며 영예롭게 여길 것인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 사도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같은 것이기를 기도한다.

 

 

나오는 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우리의 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는 먼저 나를 나로 두신 것에 충실하는 일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우리의 원수-세상은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 3:11).” 그러나 우리는 주의 권능으로,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져간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미 3:11-12).”

 

고로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욜 2:21).” 어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