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누가복음 2:25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편 116:1-2
오늘 말씀에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를 생각한다. 평생 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눅 2:26).” 이를 죽기 전에 보고 축복하는 시므온과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36-37).” 예수를 보고 이에 찬송한다. 앞서 들에서 목자들은 천사의 전하는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께 가서 경배하였다.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18-19).”
어쩌면 이 땅을 사는 데 있어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헛된 모습으로 돌아다니듯 교회도 가고, 세상도 기웃거리며 자신이 아는 것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오늘 본문과 같이 그 뜻을 새기고 평생을 주의 곁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실은 모두에게 주를 알만한 영을 주셨다. 하지만 저마다 꾀를 내어 자신들의 뜻을 좇아 사느라, 주의 뜻을 알려 하지 않는다. 오늘 시인은,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116:6).” 하는 증거에서 목자들이나 시므온, 안나와 같은 이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순진하다는 것은 좋은 의미인데 언제부터는 ‘그 정도밖에 모르는 정도’로 비아냥거리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순진함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주신 것이지 기질이나 소양의 덕목이 아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5).” 믿음과 구원은 전적인 은혜이고 은총이다. 평생을 늙기까지 주를 찾고 기다리며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시므온과 안나를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모든 이가 볼 것이고 아는 것이라 해도,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8).” 이를 어찌 흘려듣고 마는 이야기로 접어둘 것인가.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17).” 우리는 두려움으로 그 앞에 엎드려 주를 기다리듯 알고자 한다. 저는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다. 저는 ‘알파와 오메가’ 되신다. 이는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8-19).” 내가 본 것, 들은 것을 더욱 알고자 하는 탐구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모르면 전부를 모르는 것이다. 보았으나 아는 사람만 더욱 알려고 하는 차이가 있다.
그 하나님은 만유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차별이 없이 모두 안에 계신 하나님을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른다. 누구는 더욱 알고자 하여 평생을 주를 바라고 누구는 자신이 아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간다. 하나님을 알 수 없다면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단절-분리된 사람은 모든 것으로도 단절된 자이다. 철학이 갖는 한계이고 왜 철학이 신학의 걸림이 되는가를 새삼 알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는 세상은 차원 높은 하나님의 세계인데, 정작 저는 이것까지 알지는 못하였다. 저의 <자연학>은 매우 훌륭하고 정교한 하나님의 세계를 그려주고 있지만 단지 우리 하나님의 일부일 뿐이다. 자연이야말로 하나님을 순진하게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우리는 기록하고 새겨 이를 달려가면서도 읽는,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자연이 하나님의 책이듯 우리 삶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글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담아놓은 줄거리가 있다.
어제는 아이와 모처럼 통화하고 기도해주었다. 오래 준비한 시험이 턱 밑이라 여러 모로 생각이 많을 때이겠으나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묵묵히 하는 만큼 하면 된다고 일렀다. 죽기 살기로 할 건 아니라는 소리도 덧붙였다. 그러한 명석함으로 학문의 종이 될 수는 없다. 단지 좋은 직장을 위해 또는 나은 미래를 꿈꾸며 하는 정도의 수고이어서도 안 된다. 특히 저나 우리 아들이 준비한다는 회계사의 특성상 얼마나 많은 유혹과 씨름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저들의 좋은 성적을 두고 기도하기가 매번 어렵다. 다시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와 같은 열심으로 하나님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보람되다 일렀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시 39:56).” 누가 있었다. 저는 젊을 때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갔고 졸업 후에 대기업에 입사도 하였다. 얼마 후 저의 명석함으로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을 그만두고 일찍이 무슨 사업을 하여 크게 돈을 벌었다. 지금은 해외를 오가며 미국 어디에도 캐나다 어디에도 각각 집을 하나씩 장만하고 자녀들이 이름 있는 외국 대학에서 공부를 한다. 저의 소식을 듣다보면 그 자체로 부러움뿐이다. 그런들?
‘든든히 서 있을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다.’ 시인의 고백이 괜한 말이 아니다. 결국 그만큼의 사업을 일궈 떵떵거리고 사는 것 같으나 그러는 동안 어릴 적 신앙은 다 털리고, 지금도 어느 바이어와 무슨 사업을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그렇고 그런 자리에 불려 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나름은 가끔 소식을 통해 기도를 부탁한다. 그 내용이란 하는 일 잘 되게 해달라는 소리다. 명색이 선교사를 꿈꾸었던 청소년 시절의 사명은 낭만이 되어 시간이 나면 교회를 가는 정도로, 나름은 안다고 하고 믿는다고 믿는 자가 되었다. 아,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6).” 이어지는 시인의 말이 저 친구나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가? 저를 한참 부러워하던 시절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인데,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그, 나의 소망이 ‘잘되게 해달라’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일찍이 하나님이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셨다는 데 따른 소망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명이셨다. 우리로 하나님께 돌이켜 주와 같이 거룩하게 흠이 없이 순종하는 자로 살게 하려 하심이다. 믿음으로 우리를 이에 순전하게 돌이키신다. 결국 우리로 주를 더욱 알고자 하는 마음을 더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시 111:2).” 과연 이를 즐거워하는가?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던 친구가 새해 인사로 고마움을 표시할 때 나에 대한 마음이 송구할 뿐이었다. 내가 한 게 없이 주의 은혜뿐인 것처럼 내가 하는 게 없이 저가 주께 영광을 돌리기를 위하였다. 우리 안에 이 마음을 주셨으니, 더욱 주를 사모함이다. 알고자 하는 마음이다. 주만 바라는 소망이다. 이제는 확신하는 것이 하나님을 알면 전부를 안다. 하나님을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내게 더욱 주를 바라는 마음이 더하심이 가장 큰 축복이었다. 세상에서 승승장구 소위 잘나가는 친구에 대하여는 전에 가졌던 마음처럼 이상하게 부럽지가 않다. 오히려 안됐고 속상하다. 또 한 친구는 삼 대째 믿음의 가정으로 그 신앙을 이어오면서 예술가인 아내와 예술가들의 판에서 살던 가락을 좇아 저의 노년의 꿈은 지리산 어느 산자락 예술인 마을에 터를 두고 노년을 사는 게 꿈이라고 하였다.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인지, 나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옛날을 그리워하다 사무치는 마음도 들었다.
주를 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도 모르는 것과 같다. 저가 이 땅에서 이룬 업적이나 나름의 보람과 가치는 모두 허사뿐이다. 이쯤 나이 들면서 어디가 아프고, 마음과 달리 몸은 예전 같지 않은데… 그럼에도 주를 바랄 수 없는 마음의 완고함이 나는 슬프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25).” 이보다 더 값진 인생은 없다. 앞서 에녹을 위시하여,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오늘 본문의 안나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녀의 생이 결혼 칠 년에 남편을 잃고 여든네 살까지 과부로 사는 기구함을 지녔으나, 그것으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를 바라고 기다릴 수 있었으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36-37).” 우리의 소망, 그 기준의 축복은 바뀌어야 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3:5).” 나를 주관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관점으로 두고,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나를 돌이켜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고 말해줄 수 있는 자신이 가장 성숙한 신앙의 자세였다. 그 소망은 앞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앞으로 잘 될 거야!’ 하는 정도의 소망이 아니다. 이미 주의 기쁨이고 즐거움이 스바냐의 증언과 같은 나의 본질을 두고 일깨우는 소리다. 이를 알 때, 알면 알수록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바로 그 ‘여전히’가 우리로 무던하게 한다. 이에 오늘 시편은 우리의 사명을 일갈한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116:1-2).” 고로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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