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에게 향하신

전봉석 2021. 2. 15. 06:05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누가복음 3:16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2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저마다 예수를 기록하고 그의 하나님 되심을 가르친다. 저가 메시아인가? 하고 의아해하자,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 3:16).” 하고 앞서 예수의 길을 예비하였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4).” 스스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규정한다.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로 자신을 내려놓는다.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것을 주의 한다. 오규원 시인의 시 <가끔은 주목 받는 생이고 싶다>는 우리의 보탬이 성경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 같다. 작년 한 해 평균 개인방송, 유튜버들의 벌이가 평균 삼천만원이라는 뉴스에 이해가 갔다. 왜들 저마다 주목 받는 생이고자 하는지를 알겠다.

 

스스로를 낮추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아간 세례 요한의 생애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비하의 몸으로 낮추시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묵상하게 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어제는 아버지가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셨다. 말씀으로 한 생을 채우고 사는 자의 복을 어렴풋이 짐작하였다. 더러는 노년의 생을 무엇에 비유하며 ‘노년 비용’을 얼마쯤으로 산출하는데, 일찍이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넉넉하여 그때마다 채우시고 입히시는 것으로 오늘에까지 이른 생이었으니… 나도 다만 말씀으로만 온전하게 붙들려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나님이신 자신을 비워 사람이 되시고, 그것도 종의 형체로 오셨다.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시었다. 십자가는 가장 극한 형벌로 모든 죄의 가장 끔찍한 극형이다.

 

일찍이 처음 사람으로 인하여 죄의 값에 대하여는 모두가 죽음뿐이다. 그런 우리를 위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이가 죄-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죄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결국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십자가는 극형으로 저의 발꿈치에 못이 박히셨고, 저의 죽으심과 부활은 사탄의 머리-권세를 이기셨다. 구원자 그리스도의 첫 행보는 세례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요한은 저를 알아보고 극구 사양하나, ‘이제 허락하라.’ 하시며 이르시는 것이, ‘이와 같이 하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바 그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였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여담이지만 종종 나는 나의 책 읽기에 놀란다. 본래 셋째 주일인 다음 주일에 아버지가 오시는데, 설 명절 날 ‘5인 이상 모임금지’로 인해 같이 하지 못한 것 때문에도 한 주를 앞당겨서 오셨다. 어제 아침은 그래서 여느 주일 아침처럼 설교원고를 살피고 되새길 필요가 없어, 나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요한복음 강해 3장> 끝부분을 읽으며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대목이 ‘그리스도의 신분, 비하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고, 아버지의 설교 내용과 일치하였다. 마치 한 번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하듯이 놀라웠다. 성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억제하시고 사람으로 나셨다. 삼위 하나님 성자만이 인간의 몸을 가지셨다. 저는 말씀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요한복음의 태초는 헬라어로 시간의 시작 그 이전의 태초이고,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히브리어로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이다.

 

막연한 나의 책 읽기가 종종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한다. 책을 선별하고, 읽고 메모하고 묵상하는 정도까지 하나님은 그렇듯 나를 주도하신다. 이를 느낄 때면 새삼 허투루 읽고 쓰는 게 아니라는 두려움마저 생긴다. 여하튼 그 근원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 이는 스스로 율법의 만족이 되시고자 하심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성령으로 잉태하여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이가 죄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셨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이와 같은 말씀을 되새겨 오래도록 묵상할 수 있는 것이 복되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1:7-8).” 미혹을 당하지 않고 온전한 상을 이루어 가는 길이다. 얼마나 세상이 미혹적이고 유혹이 많은지 모른다. 그러니 사사로움 가운데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삶이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은혜인지 모른다. 그래서 종종 나는 아버지의 연로하여짐으로 애가 탄다. 어릴 때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참으로 남다른 위엄의 대상이었다. 오늘의 이와 같은 글쓰기가 공부도 못하고 글자도 엉망이던 어릴 때부터 설교 내용을 그렇게 받아쓰게 하였던 훈련에 의한 결실인 것 같다. 그것으로 주일을 보내고 한 주간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물론 어릴 때는 그것으로 용돈을 받으니까 그 재미로 하던 일이다. 문득 어제도 뒷자리에 앉아 아버지의 설교 내용을 받아 적고 있다, 덧붙여 메모하면서 옆에 앉은 아들을 의식하였다. 나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존재의 위엄이 오늘에 이르러서 아들에게 나의 존재는 어떠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나는 가끔 나에게 향하신 주의 놀라운 은혜와 은총에 감복한다. 돌아보면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끔찍했던 청소년 시절과 더 어릴 적 유년의 시대가 모두… 오늘 시편의 말씀이 나의 고백을 대신한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그러니 종종 내 안의 조급함이나 면구스러움은 그만한 아버지의 역할을 못하고 있는 오늘의 나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신 성육신의 복음은 나의 죄 때문에 사람다워지신 하나님, 그 이하 종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묵상하게 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그러하신 주께서 자신은 스스로 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저는 하나님으로 죄가 없으심으로 세례를 받을 이유가 없으신데, 이를 허락하게 하셨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4-15).” 세례는 죄인이 죄사함을 받는 증표다. 저는 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셨다. 이를 요한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1).”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표징과 실재의 차이다.

 

왜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시기를 허락하게 하셨을까? 이는 나의 죄를 자신의 죄로 삼으시려는 것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그리하여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니! 저는 본래 죄와 상관이 없으신 이시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히 7:26).” 이러한 말씀을 옮겨 적고 한참을 돌아보며 묵상할 수 있다는 것에 이제는 감사한다. 전부를 얻고 이를 잃느니 이를 얻고 전부를 잃는 게 나은 것이다. 나는 이제 이러한 사실 앞에 나의 남은 생이 흔들리지 않기를 구하고 바란다. 친구도 자식도 심지어 나 자신도, 내가 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저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예수 이름뿐이다. 종종 아들에게 욱, 하고 올라오는 마음도 말씀으로 되새기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에 나는 오늘 시편의 찬송이 귀하고 놀랍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