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누가복음 9:57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21:5-6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하심을 떠올린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기도가 쉬면 육이 주관하고 육을 죽이면 하나님을 바람이 산다. 오늘 주님은 이를 상기시키신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 스스로 도움을 구하려 여러 산을 기웃거리는 일이 헛되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 121:1).” 누구를 바라고, 어떤 사상을 좇고, 이념과 이상을 추구하려 드는 데서 오늘 주님은 나를 불러 세우신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 9:26).” 그러므로 불변의 법칙이 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이를 우리 의지로 할 수 없다는 데서 나는 좌절하고 또한 소망을 가진다. 좌절하는 이유는 내 의지의 영역이 아니어서, 소망하는 것은 주가 더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이어서.
곧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내 안에 ‘두고, 주고, 하셔야’ 하는 일이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곧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25).” 이를 주께서 나에게 행하신다. 주를 존중히 여길 때 나로 존중히 삼으시고, 주를 멸실할 때 나로 버림을 당하게 하신다. 이것이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눅 9:57).” 하는 결연함은 가련할 정도이다. 나는 못한다. 내가 할 수 없다. 이로써 나는 죽고 내가 산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 121:5-6).” 하는 말씀을 여러 번 입안에서 오물거리다 삼킨다. 주가 나를 지키신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신다.
이를 종종 경험하는 것은 누구와의 대화에서다. 또는 안부를 묻고 서로 방문할 때이다. 서로의 문안은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일깨운다.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하고 절로 놀라움을 체험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바꾼 게 아니듯이 우리가 서로를 변화시킨 게 아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 1:39-42).” 곧 서로의 문안과 그 고마움은 성령의 충만함으로다. 우리 의지나 노력으로 개선된 관계가 아니다. 또 상대적으로 어떤 이와는 이게 참 어렵다. 전에 그렇게 잘만 어울리고 뭐라도 내줄 사이처럼 굴었는데, 나름 먼저 ‘주를 인정하는 안부’를 꺼내어도 채 서너 마디를 오가지 못하고 시들한다. 이어지는 요란한 말들은 주식이나 부동산 시세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만남은 인위적인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저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살필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시는 데 있어 사람을 도구로 쓰신다. 모세를 세우셨던 것처럼 바로도 그 마음이 더욱 완악하게 하시었다. 성령이 임하시지 않은 사람은 악령이 임한다. 저 혼자 독자적인 생을 사는 영혼은 없다. 그럴 때 자신의 편의에 따라 주를 바라고 구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이를 묵상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고, 사람으로 사는 동안 그 요구와 바람이 어찌 자신을 추구하는 데 없을 수 있겠나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58).” 예수님은 자신의 운신과 행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셨다. 그러한데도 누가 말한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 또는 누가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1).”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는 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하여, 우리로 난감하게 하실 때가 있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60).” 진리는 때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몰아세우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그럴 때 우리의 염려와 불안, 갈등과 회의는 어쩌면 좋을까? 이를 훌훌 털어버리고 개의치 않고 의연함으로 주를 따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로서는 요원한 일이다. 이를 오늘 말씀은 확실히 짚어주시는 것 같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저가 이루시고 행하신다.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곧 우리가 따르는 도리나 가치, 우선순위를 뒤바꿔놓으신다(시 121:5-6). 좀 더 들어가 보면, 우리의 행함이 주를 향한 것일 때, 주의 영광이 된다. 언제부턴가 나는 의도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삼간다. 구구절절 저마다의 사연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것인데, 그런들 돌아보면 해결되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기도의 내용도 그 응답의 결과로 가늠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은 정탐꾼을 보내기로 결의하고 이를 주께 구하였다. 문맥적으로는 이를 주께서 승인하신 것 같으나 불신앙에 따른 결정이었고 그와 같은 응답은 저들이 정해놓은 응답으로 여겨졌다.
결국 우리의 기도까지도 주의 영이 하시게 한다. 읽고 묵상한 내용의 말씀이 내 안에 체화되기 전에는 한갓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기껏 말씀을 전하고 돌아서기 무섭게 혈기를 부릴 때도 있다. 경건하게 주를 찬송하던 입에서 저주와 원망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말씀이 나를 주동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결연한 의지는 믿을 게 못 된다. ‘나는 주를 따르겠나이다.’ 하는 누구의 고백이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리면서도 그러한 고백이 한도 끝도 없이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하게 된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무모함으로 주 앞에 나아가야 한다. 당장은 하나마나 한 소리 같아도 훗날에는 엉기고 성긴 계란이 부식되고 바위는 퇴화하고,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바위는 계란으로 인해서 깨어질 것이다. 나는 이를 누군가의 날 위한 기도에서 되새길 수 있다. 한참 주를 멀리하고 살 때, 누구는 하나마나 한 소리인데도 볼 때마다 ‘널 위해 기도할게.’ 하는 말을 던지곤 하였다. 나는 저이의 말에 개의치 않았고 설마, 하는 미동도 없었다. 어제도 모처럼 친구와 통화를 하며 각자의 생활에서 주가 함께 하심을 묻고 나눌 때, 우리가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다는 데 놀랐다. 알 수 없는 감동이 마음을 운행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눅 9:20).” 베드로는 당시 그 말의 효력이 어떠할지 알지 못했다. ‘계란’이란 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고백이 훗날에 이르러 고질절직인 나의 아집, 바위 같은 자아를 깨뜨리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다.
무엇을 기뻐하는지, 또는 자신이 바라고 구하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나는 주를 따르겠습니다.’ 하는 말에 힘을 실어주시는 이는 여호와 우리 주 하나님이시다. 이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3).” 주어진 삶은 무던히 사는 것으로 이미 충분한 순종이었다. 더러는 앞서 변화산의 황홀한 경지에 머물기를 바란다. 처음 주를 만나 감격하고 뜨거웠던 마음으로만 머물고 싶어한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이끌어 현실로 내려오신다.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귀신들린 자였다. 어부의 그물을 따라 갈매기 떼가 몰려들듯이 은혜 뒤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기껏 말씀을 묵상하고 황홀할 정도로 주의 은혜에 충만하였다 싶은데 첫 발을 딛는 순간, 납부해야 할 공과금과 유난히 짧은 월말에 도래하는 온갖 영수증들이 버티고 섰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현실로 숨이 턱, 막힐 것 같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를 현실로 끌고 내리신다(28-36).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결코 무아지경의 세계가 아님을 깨닫게 하신다. 천국은 몰아의 세계가 아니다. 자신을 잊고 주를 바라는 미치광이들의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광신자가 아니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47-48).”
전에는 부질없고 하찮아 보이던 나를 존귀하게 여김은 주가 어찌 사랑하시는가를 알면서부터이다. 인위적으로 내가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다. 저를 곁에 두시는 이의 의중을 살피고, 그 뜻이 내 몸에 체화되어 나의 삶에 녹아들어서야 사랑을 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들? 그러나 계란이 바위에 으깨져 볼썽사나운 꼴로 말라비틀어져간다 해도 우리는 자기 의지로 바위에 던져져야 하는 것이다. 넘을 수 없는 육신의 연약함과 지겨운 현실의 독촉하는 현실의 난감함 속에서 나란히 해야 하는 것은 없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곧 이와 같은 말씀의 역습이 바위 같은 나의 자아를 허물어뜨리신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우리의 과업은 살아서 사는 동안에 주를 더욱 찬송하는 일이다. 저마다 그 마음에 응어리진 것이 왜 없겠나?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이 또한 주 앞에 용해되어 주를 찬송하는 기반이 된다. 나이 들어 저절로 풀어지는 죄성이란 없다. 그러니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19).” 아, 이 아찔한 영혼이여!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편 121편, 전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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