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말씀을 열면

전봉석 2021. 2. 19. 06:04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7:23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편 119:130

 

 

그리하여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148).” 하는 시인의 고백을 가만히 머금는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으로 지음 받았으나 그것으로는 어려웠다. 처음 사람 아담은 완전한 자로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의 직분을 그대로 수행하며 복된 날을 지냈다. 저가 거하였던 에덴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저는 자기 의지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렸고,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어겼다. 곧 완전한 사람으로는 다 이룰 수 없고 온전한 영생에 들어갈 수 없었다. 신령한 영으로라야 한다. 에덴은 천국의 모형이다. 처음 아담은 둘째 아담의 예표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5-46).” 육의 사람으로는 아무리 완전하여도 안 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하는, 우리에게 아주 귀한 신앙의 이정표를 제시하였던 선지자 세례요한도 그 마음에 회의가 들었다. 옥에 갇혀 바깥 소식으로 전해지는 예수의 소문으로 그가 사람을 보냈다.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눅 7:19).” 저는 주의 길을 예비하며 당대에 완전한 자로 훌륭한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육신을 입은 자로는 신령한 자리에 나아갈 수 없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28).” 저가 아무리 난다 긴다 훌륭한 업적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였다 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곧 처음 사람 아담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며 온 인류에게 죄를 전가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세례요한의 멋진 한 생의 삶도 회의하며 갈등하는 것으로 마감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육의 사람으로는 안 된다. 신령한 영으로라야 한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17).” 처음 사람으로 인하여 사망이 왕 노릇하는 때에 둘째 사람이요,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

 

저는 말씀으로 영원 한 때 전, 태초인데 저 시간의 범주 그 이전의 영원하였던 때 전부터의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고,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함께 하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으로 오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신다. 고로 이 아침 나로 하여금 말씀을 읊조리게 하시려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게 하심은 그 어떤 은혜보다 은혜이다.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시 119:129).” 종종 누가 훌륭하다고 하나 나는 다른 할 수 있는 게 없음이다. 해야 해서가 아니라 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일상은 싱거운데 그 흐름은 잔인하여서 어김없이 봄은 오고, 아침이 되어 새로운 날은 시작되었다. 

 

저는 알까? 어제 친구와 통화를 하다 둘째 녀석이 천안에 있는 기독교 대학교, 그것도 기독교 교육학과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는 말에 축복하고 축하하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공부도 못하고 쓸데없이(?) 교회 활동에만 열심이라고 뭐라 하더니, 결국 그 아니로 인해 그의 아내는 학교에 딸린 교회에서 신앙을 이어갔고, 이내 친구도 마지못한 듯 이끌려 그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성적이 안 되니까, 수시로 간 건데! 하는 친구의 말은 시큰둥하였으나 나는 크게 축하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마음에 두었다. 저는 우연으로 치부하나 나는 모든 되어지는 일이 복의 통로인 것을 알 것 같았다. 아니면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자의가 뚜렷한 저 친구가 교회를 가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다? 어떤 마음에서인지 비록 적은 금액이나 매월 얼마씩 월급에서 자동으로 인출하게 하여 헌금을 보내온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고 있을 난들 어찌 다 알겠나만.

 

육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신령한 영의 사람으로는, 하게 하신다. 물로 세례를 받아서는 알 수 없으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알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 너머, 놀라운 섭리의 세계 가운데 오늘의 저와 나의 구원도 함께였다. 우리가 믿음 안에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곧 주의 말씀이 흥하여지고 우리로는 쇠하여지는 일이다. 우리의 자아는 소멸됨으로 우리 영혼은 말씀으로 흥하여져 간다. 자기 기분, 판단, 생각, 느낌 따위에 연연해하는 자로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누릴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실제 나의 자아를 내가 이길 수 없다. 나는 날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기분은 좌우되고 불안과 두려움은 나를 휘두른다. 방법은 하나님을 더욱 높이는 일, 하나님은 흥하여지고 나는 쇠하여지는 일뿐이다. 내가 흥하려 하면 하나님은 쇠하여진다. 낭만을 꿈꾸듯 목회를 바라고 비전을 품는 어리석음은 한동안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을 혼탁하게 한다. 하나님께 열심히 바라고 모든 것을 맡긴다고는 하지만 실제 그 주도권은 자신이 쥔 채 놓아드리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오직 예수만 바라보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3).” 마치 내가 뭘 좀 하려는 듯 그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하고 혹시나, 하고 바라는 게 있다면 영락없이 세례요한의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하였듯이 이 길이 맞나? 내가 꼭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회의와 갈등은 이중적이다. 주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여전히 육의 사람으로 살아 있다는 의미다. 주는 흥하셔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새로워져야 한다. 사도는 이를 앎으로 낙심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아는 자라면 주의 자녀인 게 분명하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진리다. 그러므로 남은 생의 과업과 영원한 우리의 숙원은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3).” 찬송과 경배다. 영광과 권능의 나라다. 이는 땅에 있을 때에 모세의 노래였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15:3).” 영원히 우리가 부를 노래이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찬양이다.

 

자식들이 둘 다 공부도 못하고 집에 처박혀 있다며 푸념하던 걱정과 달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수능고사 성적이 형편없어 한숨을 내쉬며 걱정하더니, 아이의 학교가 어딘지도 몰라 한참을 뒤적거리다 기억해낸 이름이 기독교 학교로 그것도 기독교 교육학과라는 소식에 나는 놀라웠다. 우리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고 계신다. 감사하네, 하고 저에게 말해도 저는 수화기 저편에서 시큰둥한 표정일 거였다. 이 땅에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모형이며 재현되는 표상이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이 일이 교회로만 가능하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영생의 그림자다. 그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다. 저는 그저 주식으로 많은 손실을 본 것에 대해 예민하여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직 그 가치의 값어치를 분간하지 못하는 일이다. 무슨 말을 한들 시큰둥하게 반응할 따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자들이라는 것을 한낱 주식 폭의 등락으로 비교가 될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 하는 회의가 든 것도 그만큼 우리는 완전하다 하나 완전한 사람으로는 이를 수 없는 나라이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이보다 더 큰 수확이 어디 있겠나? 무엇으로 이 소득을 비교나 할까?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우리의 이 충만함은 세상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수익이다.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곧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계시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그러므로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25).”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는 일은 전부를 잃는 것보다 비극적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맡은 자들이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2).” 우리의 유익이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된다. 그때에 우리는 죄인이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저나 나나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육신의 사람으로 육에 속하여 육을 바라며 살던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로 주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셨다. 주의 자녀로 삼으셨다.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운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 7:23).” 이 얼마나 귀하고 놀랍고 희한한 일인가? 이는 곧 주의 말씀이 하시는 일이라,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그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왜 이상한 일인가?

 

오늘 시인과 같이 아뢴다.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175).” 나를 살리시고 나를 돕는 말씀으로만이 나는 의롭고 성실할 수 있었다.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138).” 고로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101-102).” 그럴 수 있게 하시는 이가 오늘도 나로 하여금 고백하게 한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 곧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1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