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21. 2. 22. 05:59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10:23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122:1

 

 

우리의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복되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주님은 오늘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 즉 주님과 함께 하는 그 순간은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4).” 곧 이 시간 다시금 말씀 앞에 앉히시며 귀를 기울이게 하심이 감사하다.

 

어제는, 조금 아팠다. 윽,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갑자기 오른 쪽 허리가 찌릿, 하면서 통증이 가해졌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 별다른 징후도 없었다. 주일 아침, 여느 날과 같이 교회에 가서 차를 주차하는데 윽, 하더니 딛지를 못하겠고 걸음을 걸을 때면 저절로 비명이 날 정도로 허리가 아팠다. 순간 어떤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나는 간신히 교회로 갔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이것저것 영양제와 고혈압 약을 챙겨 먹었다. 조심조심 몸을 다루었다. 그래도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주일이다. 창가에 서서 설교원고를 다듬었고 몸을 비틀며 말씀에 메모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 통증은 가라앉았고 예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딱, 그만큼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이었다. 아쉽지만 아내의 운전연습은 포기하고, 오후 내내 침대에 누워 허리를 지졌다. 그러다 전하였던 말씀이 다가왔다.

 

왜? 하고 여겨지는 난데없는 고통으로 우린 더러 당황한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시 44:8).” 이 얼마나 나름은 수고하고 애쓰며 주를 바랐나?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9).”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주께서 나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는 것 같고, ‘우리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는 것 같다.’ 분명히 말씀은 우리로 기뻐하시고 즐거워한다고 하지 않으셨나?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나로 자기 백성을 삼으신 것을 기뻐하시고, 그의 이름을 위해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하지 않았나?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

 

그런데 이처럼 난데없는, 육신의 질병 또는 생활의 어려움이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시인의 표현처럼 주께서 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한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시 44:10).” 곧 나로 하여금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려는 것이다! 저들은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로 자기들을 위하여 탈취하는 자들이다. 그런 저들을 우리가 상대할 대상이 아니어서 돌아서게 하시는 것이기도 하고, 나도 저들과 같이 탈취한 것을 사랑하고 나누던 일에서 돌아서게 하시는 일이기도 하다. 즉 이와 같은 난데없는 고통이 없었더라면, 설교로 전한 말씀으로 그쳤을 것인데 나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조상들의 날’에 ‘저가 행하신 일’을 살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1).” 곧 이는 우리의 복이다. 우리 귀로 우리가 듣고, 우리 눈은 우리가 봄으로 희한하고 귀하였다. 이처럼 다시 아침에 몸을 일으켜 주의 말씀 앞에 앉히시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다. 나의 자의로 하는 게 아니다. 바울은 일찍이 육신의 질병을 병마(病魔)로 규정하였다. ‘사탄의 사자’로 받아냈다. 왜 하나님은 이를 허용하시는가? 우리로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곧 이 ‘여러 계시’는 시인의 표현대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에 따른 기록이다. 오늘 우리에게 두신 성경이다. 이를 다하지 못할 때 철학을 섞고 여러 사조를 더한다. 예수 한 분으로는 미덥지 않아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같이 높여 기도한다. 그것도 모자라 여러 성인을 내세워 저들 이름으로 구하고 바란다. 성경, 곧 옛날에 행하신 주의 말씀으로는 빈약한듯하여 참고 문헌을 인용하고 권위 있는 학회나 저들 전문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종종 나는 어느 목사를 두고 박사라 따로 호칭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린다. 아무래도 목사보다는 박사라는 직함이 더 신뢰가 가는 모양이다. 여하튼 모든 것을 떠나, 나의 시선 둘 곳을 바로 하게 하시는 데 놀랍다. 그것이 육신의 고통으로 인함이라면 달가웠다. 허리를 지지며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눕다,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시 44:3).” 하는 말씀이 새삼스러운 의미로 선명하게 다가왔다. 누구도 ‘자기 칼이나 자기 팔’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천하의 솔로몬도 바울도 저들의 학식이나 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구원은 주께서 나를 기뻐하심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149:4).” 고로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44:6).” 하는 말씀에, 나의 수고는 그만하면 족하였다. 무엇을 목적으로 두지 못한다.

 

오늘 본문 마르다에게 하신 주의 말씀도 그리 듣는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눅 10:40).” 나름 유명하신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으니 준비할 일이 좀 많았겠나? 준비하는 데 분주한 자신과 달리 예수 앞에 앉아 저의 말씀을 듣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화가 났다.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마르다는 마리아를 향한 원망보다 주께 향한 원망조였다. 그렇게 애랑 한가하게 말씀 나누는 것은 이따 하시고 좀 나와서 도우라고 하세요! 하는 소리다. 그때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1-42).”

 

종종 나는 저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내 귀로 듣는다. 성도로 치면 가족 빼고 아픈 아이 하나가 전부인 청중을 두고, 교회라고는 하나 보잘것없는 처소에서 민망할 정도의 숫자이고 모양이나… 한동안 마르다와 같이 누구를 좀 오게 하고 함께 자리를 채워야 하는 일에 궁리를 더했었다. 그러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시는 말씀을 알았다. 내게 두신 것으로 족한 것이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설교원고’라는 표현도 민망할 정도이나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누가 듣든지, 누가 읽든지, 누구의 호응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좋은 편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는 심정으로 오늘도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일어나 앉아 말씀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곧 ‘우리 조상들의 날’의 기록을 통해 ‘주께서 행하신 일’을 오늘도 이 아침에 일러주시니, 내가 내 귀로 듣는 것이 복이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44:1).” 새삼 이 한 구절 한 구절의 말씀이 새롭다. 이는 ‘여러 계시다.’ 계시는 열어 보이시는 세계다. 말씀이다. 내가 작성한 설교원고이고 이를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새록새록 들리는 소리다. 자고로 세상을 살면서도 그 품위와 체신을 위해 ‘양반은 추워도 곁불을 쬐지 않고, 군자는 종종걸음을 치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물며 주의 자녀인 것과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하는 자로 그리스도인라 하면서 나를 쳐 복종하게 함은 당연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혼자 가는 길이면 어려울 것이다. ‘한 영혼’이라도 누가 읽고, 아침마다 은혜로 시작한다며 새해 인사로 말해주었을 때 나는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하등에 쓸모없는 졸필이나,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이와 같은 시인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겠다. 어제는 허리도 아팠고, 딸애도 저쪽 다니는 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맡으면서 화상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늦어져서 못 왔고, 아내는 말씀 중에 연신 하품을 해대고, 아들은 고개를 푹 숙여 듣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앞에 앉은 아픈 아이는 알아듣기나 하나? 나눠준 설교원고에 낙서를 하고 있고, 그야말로 설교를 하면서도 설교를 죽 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를 나무랄 일도 아니어서 끝나고도 혼자 찌뿌듯한 기분이었다. 이를 오후 내내 침대에 누워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다 전하지 못한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하셨으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그렇지! 하나님만 바라자. 나는 다만 해야 할 것을 행할 따름이고, 이는 잘하고 못하고 어떤 결과와 결실은 내 몫이 아니다. 다만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그렇게 주께 맡김으로,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시 44:3).” 내가 뭘 잘하고 못하고, 어떤 열심과 수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나를 기뻐하심’으로 한다. 뭘 하든 주가 기뻐하신다! 설교는 죽을 쑤고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 쩔쩔매는 주제이나,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아, 나는 나의 조상의 날에 저에게 향하신 주의 말씀이 오늘은 내 품으로 안겨주심을 감사히 한다. 그러므로 내가 기뻐할 것은,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하는 오늘 시인의 고백과 같은 것이다. 그러할 때,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8).” 이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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