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8:16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편 120:2
그냥 평범하게 살 때보다 더 무거운 마음과 양심의 찔림이 우리에게는 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숨겨질 수 없는 자신을 두고 씨름한다. 기질이니 성향이니 하는 것에 끌려 살지만 그것으로 자신을 두둔할 수는 없다. 곧 이를 죽여야 우리 영혼이 산다. 어느 청교도 마을은 바깥에서 집안이 훤히 보이게끔 가정집을 설계하고 그 안에서의 생활을 스스로들 감추지 않고 산다고 한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우리 삶을 주의하려는 까닭이다. 더욱이 목사로, 교사로 살 때 이는 저 혼자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청교도들은 평범한 일상도 안 믿는 자들에게 비춰지고 보여야 한다고 여겨 스스로 절제하고 자신을 경계함으로 그 삶이 빛을 발하게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남다른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를 오늘 말씀은 등불로 비유하여 ‘보게 하려 함이라’ 강조하신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 8:16).”
비유는 다른 것을 빗대어 표현하는 기법이다. 실제의 것을 더욱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한 문학 기법이다. 그렇게 특별한 의미나 효과를 통해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드러냄으로 일상적이고 표준적인 상식의 수준을 벗어나서 의미를 바로 알게 하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비틀거나 비뚜름하게 표현함으로 그 속에 더욱 귀한 뜻을 담는 기법으로 예수님은 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셨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0).” 곧 우리는 등불로 살아야 하는 사명을 가졌다. 이를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않는다. 곧 자기 기질이나 성향이 내성적이라거나 수줍음이 많아서, 하는 식의 두둔으로 감출 수 없다. 그렇게 자기만을 위한 복음은 없다. 이는 평상 위에 두어 사물을 비추고 밝혀야 한다. 심지어 그릇으로 덮어두는 것처럼 '난 원래, 그래!' 하는 식으로의 은둔은 의미가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4-15).”
불빛의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빛을 보고 날벌레들이 꼬이고, 술 취한 취객이나 온갖 허접한 것들이 드러난다. 재밌는 현상은 퇴폐업소나 음란한 장소는 공통적으로 어둡고 음습하다. 저들 안에도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아는 것이다. 싫든 좋든 우리는 드러나고 보여진다. 이는 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삶이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 예수님은 이를 감추지 않으셨다. 도리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4).” 우리의 실천을 요구하셨다. 자신을 옹호하고 변명하면 나태하고 방관하게 된다. 엘리 제사장은 영적으로 아둔하여 비극을 초래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 2:17).” 저는 자식들의 소행을 알면서도 방관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라(삼하 12:14).” 이는 단순히 한 가정의 일이 아니다. 주를 욕되게 한다.
곧 우리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다. 더욱이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은 말씀으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경고하면서 자신은 그 값을 당하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 대담한 믿음은 없다. 이런 이의 특징은 다른 이에게 엄격하게 군다. 사탄은 기가 막히게 위장한다. 나도 나에게 깜빡 속을 정도이다. 저의 무기는 언제나 성향이나 기질를 탓하게 한다. 주목을 받는 자는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다. 사탄은 얼마든지 저를 조종할 수 있다. 무너뜨린 뒤에 자랑거리로 삼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연상하면 삼손이다. 저는 특별한 은사를 함부로 휘두르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살 16:21).”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저로 인해 조롱거리가 되고 업신여김을 당하셨다. 실제 우리를 아니꼬운 눈으로 지켜보는 무리도 많다. 목사가 되고 나는 종종 나의 연약함이 저들의 말거리가 된다는 것을 안다. 광신자, 현실도피자, 회피론자로 낙인찍기도 한다. 굳이 변명하거나 논쟁하지는 않는다. 저들이 나를 안다고 여기는 만큼 나도 저들의 의중을 잘 안다. 왜냐하면 내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이제 그만큼 남의 말거리가 되고 눈에 잘 띄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말씀이 어찌 이리 강경하신가를 알겠다. 호락호락한 길이 아니다. 안이하게 굴다가는 언제 나도 ‘엘리’가 되고 ‘삼손’처럼 살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큰 소리치는 목사를 경계한다. 늘 주눅이 들어 자신을 비하하는 목사도 주의한다. 누구보다 연약하다는 것은 엄연한 흠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쓰이면 훌륭한 방패와 무기가 되고, 이를 숨겨두면 주머니 속의 송곳 같이 언제든 찌른다. 가까이 할수록 옆에 사람을 치르고 자신을 치른다. 숨길 수 없고 숨을 수 없는 삶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자.’ 누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이었다. 그렇게 주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못하는 자의 몫은 더 무겁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말씀 앞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런 자는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4).” 그러는 나를 느낄 때면 끔찍하다.
분명히 하나님은 더 큰 은혜의 몫을 요구하신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10-11).” 한데 그 몫을 다하지 못할 때, 고스란히 자기 몫의 삶으로 짊어져야 한다. 우리로 등불을 삼으셨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 8:16).” 결코 감추일 수 없는 삶이 된 것 같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17).” 종종 이를 잊고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아내는 어김없이 ‘당신도 그러잖아!’ 하고 퉁명스레 말한다! 그럼 순간 감정이 상하고 하던 말을 멈추고 화를 내지만 돌아앉으면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나를 찌른다. 특히 요즘은 아들을 두고 자주 그런 경험을 한다. 이런저런 말을 서로 하다 막판에는 그게 전부 다 내 이야기가 된다. 말투며 성격이며 행동이며, 누구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도 얼마든지 천국을 얻을 수 있지만 잃을 수도 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가만히 저들의 항변을 살피면 그럴 만도 하겠다. 얼마나 나름 열심이었겠나?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으니 그 애쓰고 수고함이 남다를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였고 헌신하였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다. 그러느라 얼마나 많은 핍박과 공격도 당했겠나?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동안 저들이라고 왜 외롭지 않았겠으며 힘들지 않았겠나? 그러니 훗날 그것을 알아달라는 저들의 요구는 정당하다. 그런데 주님은,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나는 사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면 오금이 저린다. 더는 되돌릴 수 없는 자리에서 ‘난 너를 모른다.’ 하시면 얼마나 난감할까? 나름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뜻을 좇아 주가 맡기신 사명을 다한다고 하며 살았는데, 과연 그런가? 혹시라도 주님과 상관없는 주를 알고, 주님은 모르는 주의 일에 열심을 다한 것은 아닐까?
문득 열 처녀 비유가 생각난다(마 25:1-11). 같이 등불을 밝혀 신랑을 기다리다 결정적인 순간에 등불에 기름이 떨어졌다! 좋을 때야 누군들 인자하지 못하고 자비롭지 않겠나? 자기만족으로 누군들 십자가를 지지 못하겠으며 옥에 갇히지 않겠나?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하필이면 그때 기름이 모자라면 어쩔 것인가? 말씀을 잘 전하는 가짜 목사도 있다. 남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치는 거짓 설교도 있을 수 있다. 정작 저는 자신을 준비하지 못해 버려둠을 당할 수도 있다. 바울은 이를 두려워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노년에 이르러 기껏 잘 오던 길에서 이단으로 끌려가는 목사도 있다. 애써 공부 다 마치고 교회를 이루다 쓸쓸히 먹고 사는 문제로 물러앉는 목사도 보았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바울의 경계가 두렵고 무겁게 다가온다. 나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다.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는 죄성을 가지고 산다. 욱, 하고 올라올 때면 내가 전한 말씀과 내가 준비하고 묵상하였던 말씀과 너무 상치되는 '나' 앞에서 나는 무섭다. 서로 어긋나는 남모를 수치심을 느낀다. 그래서 항상 더 준비해야 한다. 등불에 필요한 기름은 날마다 채워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 시편의 말씀은 항상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같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시편 120편
그러므로 저들의 반응은 당연하였다. 삶이 고단하고 생활에 늘 짓눌려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니고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탄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나보다 훨씬 박식하며 해박하다. 영민한 논객 같고 게달의 장막처럼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그러므로 오늘도 내게 주신 나의 어려움, 가시를 감사히 여김으로 하루를 마주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1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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