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전봉석 2021. 3. 2. 06:11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누가복음 18:42-4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편 130:3-5

 

 

사유하심이 주께 있다. 주를 경외하게 하신다. 일련의 사건 사고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맞서게 한다. 누군들 주 앞에 자신하여 설 것인가? 주님은 저들의 자부심과 뻔뻔함을 혐오하셨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혐오하는 세리의 통회함을 귀 기울이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저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 스스로를 자신한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2).” 우리 안에는 이와 같은 억울함이 도사리고 있다. 나름 한다고 했다는 데서 자기 의를 내세운다. 상대적으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 그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불문하고 외쳐 주께 구하는 자는 어느 소경과 같아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물으실 때에 저는 자신의 필요를 구한다. 이는 주를 알고 신뢰하고 보게 하실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41). 이에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42-43).” 여기에 구원의 원리가 있다. 성령은 우리 안에 필요를 느끼게 한다. 앞서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은 스스로 잘 하고 있음으로 필요할 게 없었다.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 구할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다.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를 따르는 것이다. 이를 보며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 모두 죄인임을 누군들 주 앞에 설 수 있을까? 성령이 우리 안에 있어 그 증거는 기쁨이다. 알 수 없는 평안이다. 외형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고 늘 또 똑같이 어려운 처지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그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임하였다. 성령은 우리로 거듭나게 하셨고 새사람을 입어 우리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하신다.

 

전에는 ‘소경’이었고 ‘세리’였고 ‘창녀’였으나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여전히 우린 달라진 게 없이 예수를 보지 못한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랑한다.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이 일을 우리는 증명할 수 없다. 그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 이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뭐라 일러 말로다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거룩한 씨가 우리 안에 심겨졌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나는 나의 것이 아닌 게 되었다. 이를 다행으로 여긴다. 전에 같으면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내 몫의 어느 정도 지분을 요구하겠으나,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 나는 내 값을 치를 능력이 없다. 그런 나를 주가 사셨다. 이에 따른 삶의 변화는 뚜렷하다. 성령이 계시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아홉 가지 열매는 그 중심이 앞의 세 가지로 집중된다. 무엇보다 사랑은 적극적인 열매이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딛 3:3-4).” 주가 나를 사랑하심으로 일어나는 증상이라 뚜렷하다. 전에의 나와 오늘의 나는 전혀 다른 나이다. 가끔은 그때 어떻게 그러고 살았지? 싶을 정도로 아찔하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당시에는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켜 그때를 혐오할 수 있는 것은 은혜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요즘 세간에 ‘학폭’과 관련해서 어릴 적에 저지른 일이 발목을 잡는 것을 보는데, 언젠가 주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부끄러워 등골이 오싹해진다. 하물며 이 땅에서 일순간 저의 과거가 공든 탑을 삽시간에 무너뜨리는데, 하물며! 바리새인들은 대체 하나님을 얼마나 능멸하는 것인가? 주의 사랑이 아니면 용납될 수 없는 나이다.

 

성령의 두 번째 열매는 희락이다. 이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으로 우리의 혈기나 거짓 만족, 자기 합리와 소유에 대한 집착이 잠깐의 즐거움으로 이 기쁨을 훼손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맛본 기쁨은 주께 내 안에서 행하시기를 바라고 그 자리를 내어드림으로 더한다. 다음의 열매는 화평으로 이에 마음의 안식이다. 평강과 평안으로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만족함이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러는 내 자신이 이상할 정도이다. 어제는 종일 적잖은 봄비가 내렸고 나는 점심께 들어와 로이드 존스 목사의 <생수를 채우라>를 읽다, 졸다하며 혼자 시간을 보냈다. 다들 집을 비우고 혼자 있는 시간이 고즈넉하였다. 아이는 문자로 엊그제 회계사 시험을 본 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며, 다음 시험을 준비할지, 4월에 있을 세무사 시험으로 전환할지, 그 마음이 어려운 것 같았다. 저마다 꿈을 좇고 열심을 다하지만, 종종 아이와 통화할 때면 항상 주의 뜻을 먼저 바라기를 이른다. 저의 어려운 마음에 뭐라 길게 보탤 말은 없었다. 주의 영이 함께 하실 것을 구하였다.

 

성령의 열매 네 번째는 오래 참음이다. 앞서 세 가지는 적극적인 성령의 열매로 주된 것이면, 이어지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성품과 우리 일상의 소소한 변화로 증명된다. 앞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개인 안의 역사라면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역사이다. 여전히 다른 문제가 많은데 이상하게 나로 하여금 참게 하신다. 곧 문제 앞에서 그 문제로 안달하지 않고 견디게 한다. 무뎌지게 하는 것이다. 누구의 평가는 물론 심지어 자신에 대한 기대와 실망에서도 무뎌진다. 그동안 나로 민감하게 굴던 것으로부터 둔해진다. 별로 타인의 시선에 불쾌하지 않다.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내 영혼을 쥐고 흔든 과민반응으로부터 놓여난다. 오래 참음으로 이는 수련의 영역이다. 차츰 그 실력이 향상되는 것과 같다. 아, 나를 조급함으로부터 건지소서! 내 안에 이는 안달은 병적이라 나로 하여금 잠시도 희락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얼마나 해로운지 순식간에 기쁨을 앗아간다. 이를 앎으로 오래 참음은 숙련된다.

 

이어지는 자비는 부드러운 성향이고 친절함이다. 거칠고 모난 성격을 다듬는다. 오만은 호전적이고 무례하다. 함부로 남을 대하고, 물론 자신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 저는 늘 ‘널 위하여’ 하며 자녀들을 상대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다지만 그의 오만함은 언제나 위협적이다. 이에 오래 참음은 브레이크 같다. 자비는 자연스럽게 멈추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조급함만 억제해도 훨씬 여유 있게 생을 살 수 있다. 같은 의미로 양선은 남을 잘 대해주는 착한 마음이다. 천성이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나 본색은 똑같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로 얻은 양선은 의도적이거나 인위적이지 않다. 자꾸 마음이 그리로 이끌린다. 저의 소식이 마음에 걸린다. 내 일처럼 느껴지고 나를 아프게 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수준의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와 같은 착한 마음, 남을 돌보는 마음은 자신을 용납하는 데서 비롯된다. 남몰래 수치스러워하던 것으로부터 놓여났다. 자신을 몰아세워 스스로 낫다고 여기며 살던 자존심으로부터 벗어났다. 더는 꾸미고 살지 않는다. 위선을 부릴 필요가 없다. 즉 그런 자신, 맹인으로서 창피한 게 없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고 외쳐 주께 구한다. 물론 자신이 소경인 것에 안주하는 사람은 양선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 안에는 억울함만 가득하다.

 

다음 일곱 번째의 열매는 충성이다. 충성을 나는 한결같은, 무던함으로 해석한다. 묵묵히 주어진 일, 때론 부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못마땅한 것이라 해도… 꾸준하게 균형감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종종 나는 이런저런 의미를 떠나 습관대로 아침에 일어나고 정해진 말씀을 보고 쓰고 묵상하고, 일정한 동선을 따라 하루 일과를 수행한다. 어제그제 날씨 탓에 몸은 여의치 않았지만 그럴 때면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한다는 생각으로 몸을 움직였다. 실제 충성은 주인이 대한 무한한 신뢰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그때마다 자기변명에 능한 자는 이상하게도 늘 변명거리가 생겨난다. 들어보면 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지? 여러 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보면 꼭 핑계 대는 아이가 또 핑계가 많다. 변명하는 아이가 또 변명을 한다. 희한하다 싶을 정도 늦는 아이가 늘 늦고, 안 하는 아이가 또 안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유로 드는 사연이 스스로도 억울하겠다. 뭐라 할 말이 없는 상대다. 결국 충성된 삶이란 그처럼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성경은 일러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내가 충성될 때 충성된 자에게 가르칠 기회도 온다.

 

온유는 순하다. 단순히 그렇다. 공격적인 성향이 없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저에게 있어는 복이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그가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 밟고 사는,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 알고, 자족하는 삶이다. 주는 온유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9-31).” 옛 자아의 나는 ‘무서운 나’였다. 거칠어서 조금만 감정이 상하면 억제할 능력이 없다. 금세 의기소침하고 한없이 침울해하고 가까운 이를 몰아붙이듯 공격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온유한 나는, 내가 죽어서 사는 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고 성령의 마지막 열매는 절제다. 절제는 자기통제이며 수양에 따른 수련의 결과다. 이는 결코 소극적인 활동이 아니다. 자신을 쳐 복종시켰다는 바울의 아주 적극적인 자기관리를 연상케 한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잘 훈련된 말처럼 그 힘을 허투루 허비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어제는 이처럼 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을 읽으며, 이와 같은 내용으로 묵상하고 메모하며 하루를 보냈다. 어디가 아팠고 혼자서도 안정제를 여러 번 먹었다. 꿀꿀하기도 하였다. 그런들, 무엇을 바라는가?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 나는 또 무너진다. 그리고 나의 믿음을 돌아본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기를 소원한다. “이를 보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찬양”한다(눅 18:42-43). 우리의 모든 사유가 주께 있음이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고로 나로 하여금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 복이었다.

 

그리하여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시 130: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