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9-10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1
삭개오 앞에 오시고 먼저 그 집에 들어가신 이는 주님이시다. 그때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믿는 자를 위한 행보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다만 주를 영접함인데, 그것이 주가 오신 목적이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9, 10).” 오늘은 이에 성경을 통해 성령은 역사하신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이 일은 믿는 자를 위한 것이고 믿을 자를 겨냥하신다. 삭개오를 먼저 찾으신 것은 주님이다. 그렇게 특정한 사람을 향하신다. 대상은 믿는 자이고 목적은 구원을 입은 우리의 확신이다. 삭개오의 뜬금없는 토설이 저의 안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증거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7).” 주가 더하시는 마음은 불가항력적이다. 그리 여겨지는 데는 스스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 누구를 향한, 어떤 일에 대한 마음은 때로 참 낯설다. 전혀 내 것 같지 않다.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누굴 위하고 더하여 마음을 기울이던 사람이 못 된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11:23).” 전적으로 주의 것임을,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이와 같은 말씀으로 불가사의한 나의 실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종일 특정한 책을 더듬고 읽으며, 문득 누구 생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다, 그러는 내가 사뭇 이상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그저 사느라 사는 문제의 하나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가령 무엇을 메모하다 그것을 왜 메모하고 있는지 되묻는다. 어떤 이의 사연에 대해 마음을 쪼이다 그러고 있는 내 자신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곧 임의로 부는 바람 같아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말씀 앞에서 저절로 열리는 시선도 그러하다. 그 의미가 새로운데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가 따로 계심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이는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어서 마치 삭개오가 주를 찾은 것 같지만 저의 자의가 실은 주가 찾아오시는 길 위에서였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 19:4).” 저는 세리요, 부자였다. 모든 이의 혐오와 갈등의 시선을 저도 안다. 평소 같으면 자격지심에 숨거나 더 큰 소리로 행세했을 텐데, 채신머리없게 나무 위로 올라갔다. 소문으로 듣던 예수를 보기 위해서이다. 만일 주께서 멈추지 않으시고, 저를 찾지 않으셨다면 그저 그런 호기심의 하나로 그쳤을 것인데,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 주께서 오신 목적이 있으셨다. 요한은 훗날에 이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때에는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뿐만 아니라,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증언하였다(요 16:13).
즉 오늘의 모든 경과는 우연이 아니다. 성경은 성령으로만 읽힌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열리지 않는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이 일이 육의 일인지 영의 일인지, 나는 아주 단순하게 분간하는데 그것은 자연스러움 가운데 역사한다. 억지스럽지 않다. 애쓰지 않고 마지못해 하는 게 아니다. 누가 성경 공부를 같이 했으면 하고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 나는 기도뿐이다. 오고 가고, 하고 안 하고는 내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를 따라 역사하시는 이가 저의 마음에서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땐 그냥 지르듯 말해버리고 수습은 주께 미룬다. 또는 마음에 두고 내내 주께 구한다. 성경에 대한 열의는 내 것이 아니다. 하물며 누구더러 강요하여 더할 수 있는 마음도 아니다. 종종 이를 빙자하여 자기문제에 초점을 맞추고는 하는데, 성령은 이를 경계하신다.
누구와의 만남이 어려워진 것은 나는 말씀을 권하는데 저는 생활을 논하고자 하였다.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성경을 원했고 삶의 위로와 평안을 얻고자 예수를 더 알기 바랐다. 단지 그 정도의 나눔이라면 굳이 교회가 아니고, 나 같은 변변찮은 사람도 아니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인데 뭐라 위하고 격려할 수 있겠나? 다만 아멘, 하고 주를 바라기를. 하지만 저는 안부를 묻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좋은 사이’를 원하였다. 기독교는 단지 치유와 평안이 목적이 아니다. ‘이 집에 구원이 이르리라.’ 곧 예수가 좌정하시기를 바라신다. 그러할 때 삭개오의 느닷없는 토설과 자기 것을 내어놓는 역사는 지극히 자발적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을 때 그리 나누고 모이기를 힘썼던 것과 같다. 단지 넋두리나 푸념 따위의 말로 말벗이나 하자고 만나는 게 아니다. 우리 불행의 원인은 무한정 옛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미련이다. 그리움은 난제다. 서로의 문안은 성도의 교제이어야 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히 13:24).” 앞서 강조하였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10:32).” 주를 기억함이다.
기껏 믿음으로 돌이켜 주를 바라게 된 것을 허투루 여겨서는 안 된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33-34).” 우리가 서로에게 문안하며 위로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성령으로다.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다. 옛정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35).” 이는 곧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서로를 의지하는 것이 주를 더욱 바라게 하기 때문이다. 어려울 때면 주를 바라나 안이하고 스스로 평안할 때는 외면하는 게 우리 속성이라. 누굴 생각하고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서 나는 종종 예전의 조바심으로 혼자 몸서리칠 때도 있다. 그럴 때 사도는 직언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어제는 이 한 구절이 나를 사로잡으셨다.
‘예수를 바라보자.’ 내가 아니다. 내 곁의 은인도 아니다. 가족도 친구도 사랑하는 무엇도 아니다. 이를 나는 아이가 볼 수 있었으면, 하고 주께 바라였다. 낙심이 오고 근심은 다시 우리 목을 서늘하게 하는데,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저마다 살 궁리에 여념이 없다. 용기를 내어 누구와 통화를 하면 영락없이 상처만 받는다. 온통 사는 이야기로 끝난다. 돈돈거리고 어디 신도시 운운하다 정치 이야기로 겅중거리는 말들은 통화가 끝나는 동시에 빈 입맛만 다시게 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상대에 대하여는 주가 아직 더하지 않으시는 일이다. 내버려두는 것도 지혜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더욱 확실히 하게 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즉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에 힘쓰지 않는다. 주가 이를 알게 하신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람 사이든 어떤 일이든 되어지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다. 애쓰게 하지 않으신다. 내가 수고하지 못하게 하신다. 왜냐하면 후에 나의 공로를 요구할 것을 아신다.
나로 하여금 그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삭개오 앞으로 가신 이는 예수이시다. 저는 모두가 꺼려하는 직업으로 동족들의 따가운 시선에 스스로 무장하며 살아야 했던 사람이다. 저마다 우린 스스로를 무장하고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좀 나아진 척을 하고 산다. 그 안에는 숯을 하나씩 품었고, 커다란 돌덩어리가 얹혔다. 어찌 그 속이 타지 않겠으며 사느라 짓누르는 무게에 숨을 온전히 쉴 수 있겠나? 누구와 통화하다 보면 저의 말들이 그리 여겨져서 안 됐고, 누구와는 주의 도우심을 신뢰하며 바랄 뿐이다. 시인은 어찌 그 분량을 알았을까? 이는 바울의 설교에서도 잘 나타났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언제부턴가 나는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주를 바람은 주께 맡김인데, 주께 맡긴다는 것은 나를 주장하지 않는 일에서부터였다. 내가 애쓴 거, 수고하고 기력을 다한 것을 삭개오는 아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잘못을 뒤로하며 내어놓았다. 주께서 그리하라 하신 게 아니라, 우리 안의 성령의 역사는 내가 아는 나를 뒤집어엎으신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가끔씩 내가 나로 여겨지지 않아 낯설 때가 있다. 어떤 일을 두고 의외로 평안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이를 시인은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엄마 품에 안긴 아이 같은 삶인데, 뭘 모르는 젖먹이 어린아이가 아니라, 젖 뗀 아이다! 의식도 생각도 없는 존재가 아니다. 엄히 스스로의 기준을 정한 것이다. 누구를 권면할 때, 주의 뜻을 바라자는 말을 종종 하는데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가 아니다. 저마다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산다. 어쩌겠나?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일 테니, 무엇으로 하느냐보다 나는 누구냐의 문제가 더욱 각별하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이를 받고 안 받고는 전적으로… 자신의 몫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을 따를 것인가. 오늘 시편은 손을 내민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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