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전봉석 2021. 3. 4. 06:1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누가복음 20:46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시편 132:8

 

 

‘짐이 가벼울수록 더 나은 여행을 할 수 있다.’ 사심 없이 살기란 아무래도 힘든 모양이다. 자기를 위하는 생각이 많으면 참 기도는 어렵다. 주를 바라는 마음은 자신에 대해 덜 구하는 것이다. 거룩이란 주만 바람인데, 경건한 사람은 그래서 자기를 부정한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여러 번 되뇌며 묵상해도 자의로 이 일을 하기가 어렵다. 내가 어찌 하려기보다 주를 바라는 이유다. 주님은 그런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도 문득 내 안의 원함이 무엇인가를 눈여겨보게 된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눅 20:46).” 이것이 단지 어느 사람들만의 일이겠나? 우리의 속성이 그러해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여든을 훌쩍 넘기고도 마음은 청춘이라, 뼈를 상해 보조기를 의존하여 걸어야 했다. 그나마 병원에서는 못 걸을 것이라 진단했는데 그나마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저는 자식들을 원망하고, 더 좋은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기를 고집하였다. 아직 너끈하게 걸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몸은 여의치 않고 마음은 성화니 자신도 죽을 맛이다. 누구와 통화하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하시는 말씀이 뇌리를 스친 것은 그때이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한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신을 높인다. 나이가 들면서 자주 드는 생각이 ‘속았다’는 것이다. 나는 나이 들면 저절로 좀 누그러들 줄 알았다. 우스운 소리지만 그래서 나는 늙는 게 싫지 않았다. 덜 바라고, 덜 안달부리며, 덜 성화일 거라 여겼다. 아주 어릴 때 나는 조모의 시선에서 어렴풋이 그런 부러움을 느꼈다. 할머니 뭐 봐? 하고 물으면 할머니는 돌아보지도 않고, 보긴 뭘 봐! 하면서 다시 또 한참 뒤 물끄러미 시선을 저기 어디에 놓곤 하였다. 어린 게 뭘 안다고, 나는 그 시선의 끝을 궁금해 하였다. 가만히 그렇게 하염없이 눈길을 두고 있어도 좋은 곳, 노인이 되면 나는 저절로 그와 같이 눈길의 끝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오늘 본문의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로서는 감당이 되지 않을 지점이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인생이 덧없음을 저들도 알면서 결국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 합당하지 못한 일 가운데 탐욕도 있고 추악도 있다. 자기를 자랑하는 우매함도 있다. 나이 들고 병들면 나는 저절로 ‘시선의 끝’에 닿을 거라 여겼다. 실은 그 시선이 싫었던 것이다. 누구는 어머니의 그러한 노욕(老慾)을 속상해하였지만 사람은 저절로 수긍하는 존재가 아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여러 시선이 맞물며 으르렁거리는 게 당연하다. 똑같은 일을 두고도 진영논리에 갇히고 당파싸움에 본질은 외면당하는 게 어제오늘의 일인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참 기도는 묘연하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시 132:8).” 이는 기름부음 받은 자들이 아뢰고 누려야 할 곳이다.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10).”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단지 관조적인 시선의 끝을 찾는 것이 인생이 아니다. 나를 두심은 회복된 직분을 감당하게 하려 하심이다. 누구와 통화를 끝내고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면서 전혀 새롭게 열어주시는 말씀 앞에서 나는 분주하게 메모하고 밑줄 긋고 메모한 여러 개의 쪽지를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였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이는 선포이다. 선지자의 특권이며 예언이다. 이를 위해 우리로 사역자 되게 하신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히 1:7).” 규는 주가 정하신 모든 범주의 이치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규는 공평하다.’ 이를 예언하고 선포하는 일이 우리의 사명이다.

 

곧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대관절 이와 같은 선포는 않고 우리는 대체 무엇에 정신이 팔려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보존하실 나라’에 대하여,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 11:15).” 이를 시선의 끝에 두고 사는 삶이 복되었다. 당장의 서러움이나 원망으로 눈이 가려지면 늙으나 젊으나 사는 게 그저 고달플 따름이라. 주의 나라의 공평한 규는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4-5).” 그 범위는 막연하게 확장되어 몽환적인 세계가 아니다. 매우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온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이미 주께서 이루신 세계라. 우리의 직분은 회복되었다. 기력을 돋우어야 한다. 중생과 성화는 동시에 시작되는 일이나 중생은 완성본이면 성화는 조립본으로 주어졌다. 가만 있다고 저절로 시선의 끝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그리 정하셨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전 8:12-13).” 세상이 참 불공평한 것 같지만 이는 반드시 바로 잡힐 것이다. 이를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말씀을 근거로 전하여야 할 사명자들이다. 이는 악인을 위한 선포가 아니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11).” 뭐라 한들, 들을 귀 없는 자에게는 소용이 없으나 우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해주어야 한다. 믿는 자는 주의 자녀들로 모두 선지자의 직분을 부여 받았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완전한 사람일 때 기여하고 행사하던 권능이다. 저는 예언하는 자로 모든 사물의 이름과 온갖 생물의 이름을 부여했다. 모두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이를 보시기에 좋았다. 누가 묻기를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고 묵상글을 쓰나봐? 하면, 나는 계면쩍게 대답한다. 하는 게 그것뿐이라, 그게 나의 일이다. 그것을 나에게 맡기신 일로 붙들고 사는 것, 나의 시선의 끝 한 자락에 펼쳐져 있는 세계다. 뭐 그리 대단히 세상을 휘젓고 다닐 게 많아 긴 옷 입기를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느라 정치화 돼야 한다. 어느 목사에 대해 들으며 그런 생각을 문득 하였다. 말씀도 좋고 능력도 뛰어나고 성실하고 모범이 되는 여러 자랑을 듣다가 지역사회에서도 그만한 목소리는 낸다는 소리에 아찔하였던 것은 순전히 나의 선입견이었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일로 부산한 것에 대하여, 한 가지 일로 족하다는 데 나는 가치는 옹졸한 시선인 것인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여기에 우리는 예배자로서의 사명이 있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 45:10).” 내게 익숙한 세상에서 나에게 낯선 것을 예배하기는 그만큼 어렵다. 그러느라 하나를 버리든가, 모두를 잃든가, 둘 다를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12).” 곧 ‘네 얼굴 보기를 원한다.’ 제사장의 직분은 삶이 곧 예배로다.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11).” 그러자면 선행되어야 할 것이 내 것이라 여기는 것으로부터의 놓여남이다. 여전히 내 것을 주장하면 단순히 노욕(老慾) 이상의 교만함으로 주를 버리는 것이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이 단순한 이치 앞에 모두는 치를 떤다. 편협하고 옹졸하기 그지없는 주장이고 요구인 것 같다. 하면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시 45:11).” 하시는 말씀 앞에서는 어찌 고개를 숙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주를 찬송하고 경배한다는 것은 나를 찬송하고 위하여 숭배하던 것들로부터 부정당해야 한다. 그러해야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시 45:15).”

 

그 나라에서는 그것으로 누림이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곧 이는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이것이 제사장으로서의 우리의 날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8).” 단순히 나는 목사여서 그런 일을 행함이 아니라, 서로를 위로함은 예배자의 권한이며 의무이다. 그러할 때 왕의 통치는 살아난다. “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시 45:16).” 이에 우리는 모두 계승자들이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내가 나의 임의로 취한 게 아니다. 이는 두려운 권한이고 막중한 책임이다. 나를 통치하고 다스려야 한다. 곧 내게 더하시는 한 날의 수고를 통치해야 한다. 늙음을 다스려야 하고 노욕을 눌러 잠재워야 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4-15).”

 

일련의 사소한 나의 일상도 그 소소한 흐름이 주의 손길 가운데 있다. 누구와 통화를 할 때 하필 그런 뒤 설교원고 초안을 잡거나 앞서 어떤 말씀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주를 바란다는 일, 느닷없는 현실은 없다. 모두가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맡은 자로 산다. 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글쓰기나 나의 묵상이 실은 내 것이 아님을.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시 132:5).” 어쩌면 노인이 되어가면서 나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일이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0).” 이는 곧 시선의 끝에 있는 세상을 바라봄이다.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시 132:7).” 그러므로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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