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누가복음 21:14-15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가끔은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일이 지겹다. 여러 날 같은 내용을 번복하는 셈이라 고인 생각이 흐르지 않으면 지루하다. 그럼에도 그 안에 즐거움이 있다. 다시 볼 때마다 새롭다. 성경으로 말씀하신다. 성령은 성경으로 일하신다. 이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성경이 불특정다수를 위하지 않는다. ‘믿는 너희에게’ 정하신 것이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하시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34).” 그렇게 흘러가는 무리가 있다. 방심하다 금세 또 한 주가 흘렀다.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잠 5:16).” 내게 맡기신 삶을 내가 감당하지 못하면 저만치 간다.
한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잊을만하면 연락을 하여 이런저런 사연을 들려주는데, 녀석은 여전히 집에서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고 있었다. 벌써 동생은 대학을 졸업하여 간호사가 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소식을 전하면서 자신은 여전히 답보상태였다. 가뜩이나 코로나가 저의 발목을 잡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놓아두었다. 다음 주쯤에 한 번 오겠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라고 하였지만 벌써 마음이 지치는 것 같았다. 유난히 애쓰고 공들였던 아이다. 저쪽 글방에서 꽤 오랜 시간을 같이 했다. 주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내가 이룰 수 있는 상대는 없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7).” 사명감이 아니면 모든 게 허사다. 새로 우리 곁에 두신 ‘탈북 아이’는 남의 손에서 생활한다. 저의 엄마는 지방 어디에서 입에 담기 민망한 일을 하며 돈을 번다고 들었다.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를 아내는 유난히 안쓰러워한다. 앞서 ‘자폐 아이’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한글도 읽고 제법 제몫을 하는 모양이었다. 새로운 아이 곁에서 모르는 것을 가르쳐준다며 아내는 감탄하였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닌 것이다. 다만 주께 받은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하는 바울의 고백이 진짜다(11:23). 한참 때 나는 내가 어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안달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렇게 정을 많이 주었던 아이들로부터는 아예 소식도 없다. 저 아이가 다음 주쯤 온다니까 아내는 몇 명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 애는 요즘 어떻대? 하고 물었다. 내가 저를 어찌 여기는가 하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주가 인도하실 일이고 나는 그 길에 서 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내가 하려고 하면 주님은 가만히 계신다. 내가 인내로 자리를 지키면 주가 맡기신다. 맡김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이다. 여러 사연의 아이들이 오간다. 나는 아내에 비해 누구에게 자주 연연한다. 너무 감정이입을 하지 마, 하고 핀잔을 듣지만 그게 마음 같지가 않다. 아이가 온다는 소리에 새로 또 연결되는 게 은근히 긴장을 더하는 것 같았다. 한참 자살충동에 시달리고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있던 때에 나는 그런 아이를 어쩌지 못해 내 스스로가 휘둘려 안달이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알게 할까? 내가 어찌 하려는 것을 멈춤으로 주가 하시는 일을 본다. 언제부턴가 나는 가장 소극적인 노력으로 모든 연락을 끊었다. 전화번호가 저장된 게 몇 개 없고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던 이름들이 사라졌다. 누가 어떻게 지내? 하고 물으면 나는 새롭다. 그러다 문득 내 일을 미루고 마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직분을 회복하고 맡기신 사명을 준수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어제는 괜히 저들이 나간 것인지 내가 나온 것인지, 어떤 그리움인지 막연한 안타까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멱살을 잡힌 것 같았다. 하면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 우리의 처음 사람 아담이 누렸을 가장 완벽했던 인간으로서의 복된 사명의 날은 길지 않았다. 완전한 사람으로는 이룰 수 없는 나라였다. 저는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자신의 막중한 사명을 손실하였다. 더는 예언의 능력이 발휘되지 않았다. 저가 낳은 처음 아들이 동생을 죽이는 인류 첫 번째의 살인자가 되었다. 인류는 덫에 걸렸다. 간헐적으로 주의 은혜로 연명하는 동안 에녹이 있었고 노아가 있었다. 그때마다 주께서는 은혜의 끈을 아주 놓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모든 시대마다 미혹의 영이 득세하였다.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6-27).”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서의 직분을 회복하셨음에도 저마다 너무 오랜 시간에 길들여져 이를 발휘하는 능력을 손실하였다. 그래서도 성경뿐이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요한은 이를 엄히 강조하였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5).”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안의 어둠은 속수무책이다. 드러나지 않을 게 없다. 이런저런 말을 좀 더 나누었어야 하는데, 싫은 마음이 앞서서 일찍 끊었다. 다시 얽히고 싶지 않았던가보다. 그런데 오후께 다음 주쯤에 찾아와도 되냐는 문자에 한참 동안 답을 미루었다. 싫다 할 수 없는 마음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런 내게 오늘 아침 주가 이르시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4-15).” 만나서 뭐하지? 무슨 말을 하지? 앞서 고민할 일이 아니다.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숨기고 있던 싫은 마음을 들킨 것만 같다. 이상하게 생인손 같은 상대가 있다. 수많은 아이들이 스쳐가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그리움을 더하기도 하지만 그 중에는 그렇듯 자꾸 아픈 아이가 있다. 얼래도 달래기를 누구에게는 내가 울먹거리며, 이만큼 마음을 주었으면 밖에 있는 담장도 자랐겠다! 하며 답답함을 토로한 적도 있다. 어느 아이는 너무 일찍 몸을 아무한테나 주었고, 누구는 아무리 아니라 해도 스스로의 외모에 거식증을 가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틀이 멀다하고 죽을 것처럼 굴던 아이도 있고, 누구는 실제 자신의 친부를 죽일 치밀한 계획을 들고 오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휘둘렸고 심지어 곁에서 보던 누가 ‘너에겐 왜 그런 애들만 꼬이냐?’ 하는 비아냥거림도 들었다. 그때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이 마음을 쥐락펴락하던 아이들이 지금은 어디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는지. 전화가 들어올 때 나는 사실 그 이름 앞에서 받을지 말지 망설였다.
여전히 나는 마음이 먼저 요동을 친다. 오죽하니 저와 통화하면서 진정제를 한 알 삼켰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뒤집어 내가 이제 저들을 꺼려하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밖에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잘해주고 곁에 있다고 될 일이 아니다. 치대듯 한 영혼을 돌볼 수는 없다. 실제 이 일은 두려울 정도로 가슴 벅찬 일이다. 마치 본 적도 없고 겪은 적도 없는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 같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이상하게 자꾸, 아픈 데 손이 간다. 생인손 같은 상대를 두고 외면하며 모른 척 살아갈 수는 없다. 거스러미 하나에도 온 종일 쩔쩔매는 게 우리 인생이다. 얼마나 허약한지, 주의 영이 아니시면 감당을 할 수 없다.
와도 되는가 묻는 아이에게 그러라고 답을 하고 설교원고를 마저 정리하고 있을 때, 행여 나의 이 일이 베드로가 다시 마주하기 싫어하던 현실로부터의 도피는 아니었을까?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설교원고만 작성하고 그 황홀함에 젖어 있을 때는 심신이 다 위로가 된다. 한데 현실은,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15).” 산을 내려오기 무섭게 우리의 지긋지긋한 현실은 엄습하고 달려드는 것이다. 베드로의 소원대로 그곳에서 여생을 마주했으면 거기가 에덴이지 않았을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17).” 우리 힘으로는 맞닥뜨려 상대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어쩌면 나는 자꾸 주눅이 들어 회피하고 숨으려고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슬그머니 다시 이끄시는 자리는 왁자지껄한 삶의 한복판이었다.
오라하고 마주해야 한다. 앞서 궁리하는 것을 경계하신다. 다만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하시는 말씀 앞에서 가만히 손을 모으는 것이다. 내가 어쩌겠나? 이것이 우리의 연합이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곁에 두시고 저를 위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으로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2-3).” 주께서 명령하신 복은 영생이었다. 이를 누릴 영혼은 인내로 다루신다. 이를 소망으로 알게 하심이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러므로 인내는 가치가 있다. 이는 나 혼자의 일이 아님을 거기에서 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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