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누가복음 22:33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1
각오하고 다짐한들, 인생의 밤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주님은 앞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1-32).” 항시 사탄은 기회를 노리다 틈이 나면 비집고 들어온다. 마음은 휘청하고 굳게 결심한 것은 속수무책이다. ‘그 밤’에 성전에 있는 것으로도 복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송축하라. 단순히 우리가 각오하여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영영 그 기회를 놓치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숨 가쁘게 경고하셨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눅 17:26-29).”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어찌 나쁜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는 일이 어찌 옳지 않은가? 그래야지, 사는 날 동안 사람이 사는 데 따른 일인데 이를 뭐라 하시는 게 아니다. 다만 그러느라 홍수가 내리고 성이 무너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세대의 분주함에 대한 경고이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0).” 곧 주의 재림에도 사람들은 돌아볼 기회조차 없다. 다들 사느라 여념이 없어 사는 일로 급급하다 죽는 줄도 모른다. 정작 우리의 느긋함에 대하여 성경은 재촉하고 경고음을 울린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지금이다. 은혜 받을 때다.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 이 시기는 자다가도 깰 때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성경의 경고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고 팔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느라 여념이 없다. 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그런 가운데 우리는 성전에 있다. 오늘 시인은 이를 송축한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무려 120년 동안이나 비가 온다 온다 하면서도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노아는 열심히 방주를 지으며 사람들을 전도하였으나 모두들 아랑곳하지 않았다. 성적으로 문란하고 악이 가득 차고 넘치는데도 사람들은 설마 설마 하였다. 그렇듯 우리 안에는 이상하게 태평한 근성이 있다.
폐암으로 죽으면서 이주일은 흉한 몰골로 공익광고를 찍으며 ‘담배는 독이다.’ 하고 전국민을 향해 외쳤다. 그럼에도 여전히 엄청난 사람들의 흡연은 이어지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알리며 멸망의 시간이 45, 50분을 넘어서는데도 급박한 위기의식은 없다. 가뜩이나 코로나로 배달음식이 늘면서 어마어마한 쓰레기가 배출되고 있다. 그에 따른 크고 작은 자연재해가 세계 각국에서 경고음을 울려대는 데도 잠시 그때뿐 우리의 안이함은 위기가 닥치는 그날까지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그렇듯 예수의 재림과 개인의 죽음은 언제 임할는지 알 수 없으나 두려움을 상실했다. 모두는 천년만년 살 줄 알고 사는 사람들처럼 하루하루 미룰 뿐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주님은 끔찍한 결과의 최후를 경고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4-35).” 밤이 이르렀을 때 누구는 자다 데려감을 당하고 누구는 버려둔 채였다. 먹을 준비를 하느라 맷돌을 갈다가도 누구는 데려감을 당하고 누구는 버려둠을 당하였다.
잠자는 데 누군들 정신이 있었겠나? 먹고 사는 문제 앞에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겠나? 그런데도 누구는 데려감을 누구를 버려둠을 당하는 일이었으니, 이 놀라운 갈림을 두려운 마음으로 주목해야 한다. 자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장가도 들지 말고 시집도 가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살아야지.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는 그 일도 맡기신 일인 것을. 다만 그것에 정신 팔려 오늘만, 오늘만 하고 미루는 것들에 대하여. 딸애에게는 네 명의 절친이 있다. 하나가 시집을 갔는데 안 믿는 남자에게 갔다. 저의 부모도 목회자라 극구 말렸으나 안 믿는 가정으로 시집가서 저를 구원하네, 어쩌네 하면서 결국은 그 뜻을 이루었다. 들어보니 다들 부러워할 만하다. 번듯한 아파트 한 채를 사주었고, 연습 삼아 주식을 하며 돈을 좀 굴리라고 일억을 통장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반대하던 목사부모도 그 곁에서 함께 동무하던 친구들도 모두 부러워하며 좋아한다는데… 아니나 다를까, 안 믿는 가정에 시집가서 저들을 전도하는 일보다 저들 속에 동화되는 게 더 무난하고 수월하였다. 목사 자녀로 신학까지 하고 교회 사역도 감당하던 그 친구는 안 믿는 신랑 따라 주일에 한 번 가던 교회마저 요즘은 빼먹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식탁머리에서 들으며 나는 혀를 찼다. 그렇듯 반대를 했으면 뜻을 굽히지 말았어야지. 자식 이길 부모 없다지만 기어이 때가 차기까지는 아랑곳도 않을 모양이다. 며칠 전 공휴일에는 집들이를 가네 마네 하더니 무산되고, 그런저런 이야기에 나는 주께 생각이 많다. 아들이 공부하는 회계사시험도 이를 어찌 해야 할지, 마음만 어렵다. 돼도 걱정인 게 남의 돈을 다루는 일이라! 오죽하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저마다 안 그럴 자신이 있다고 각오를 하진만 오늘 본문에서 보는 베드로의 처지가 어떠했나? 사람, 자신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인데도 다들 저마다 괜찮다, 잘할 수 있다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혼자 마음이 어렵고 생각이 많아서 유난히 불안은 가중되고 안정제를 먹는 횟수는 늘었다. ‘코로나 블루’ 때문이라며 담당의도 대수롭지 않게 진단을 하고 말지만, 나는 나를 주체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사느라 사는 데 따른 열심으로 우리는 엄청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시대마다 동일하였고, 노아의 때도 롯의 때에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예수님은 상기시키신다. 곧 주의 재림 때도 그러할 것이다.
누구는 이를 더디고 묘연하다고 하여 믿을 게 못 된다고 하나, 그만큼 주의 오랜 기다리심은 긍휼이시다. 실제 악을 범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장수하고 더 오래 사는 것에 놀란다. 이를 저들은 축복으로 여기지만 그만큼 더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저들은 스스로 무산시키는 것이다. 기어이 구원의 방주 문이 닫히고 비가 오는 날에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장가들고 시집가느라 여념이 없다. 이내 성곽이 무너지고 불덩이가 떨어지는데도 저들 사위들은 농담으로나 들으며 웃어 넘긴 일이다. 하긴 또 애써 위기를 모면한 줄 알았는데 미련은 남아 뒤를 돌아보던 롯의 처는 얼마나 끔찍한가. 나는 설교원고를 마치고 비스듬히 앉아 옥한흠 목사의 설교영상을 보다 저의 설교에서 다시금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었다. 안이하고 태평할 때가 아니다. 결혼하면서 부모 잘 만나 번듯한 아파트 한 채 가지고 시작하였다고, 주식으로 돈을 불리는 연습을 하라며 턱하니, 일억을 현금으로 안기는 부모를 부러워하는 것이야 누가 마다하겠나만! 그러니 굳이 심판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억대 연봉을 받으며 보란 듯 법무회계법인의 일원이 되어 잘나간다 한들, 그래서 부자나 기업의 돈을 이리 저리 굴리며 자나 깨나 돈을 다루는 일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사탄이 가만히 내려버려둘까? 나는 요즘 주님 앞에서 생각이 참 많다.
뭐라 한들, 다들 장성하여 저들 몫의 선택을 하며 사는 것일 테니. 딸애는 돌아오는 주일부터 비대면예배가 풀려서 다른 교회로 간다며 알렸다. 가라마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나는 내색은 하지 않지만 마음은 어려웠다. 누구더러 뭐라 이르겠나? 자식도 내 맘 같지 않고 하물며 나라고 난들 내 맘 대로 되던가? 감 놔라 배 놔라 누가 들을 것도 아니지만, 나는 무던히 주만 바라며 생각이 많다. 주께 아뢰고 아뢰어도 고할 것이 참 많다. 이 모두는 지극히 개별적인 일이어서 부모라고 자식을 대신할 수 없고, 심지어 나라고 나를 다스릴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말씀을 접고 로이드 존스 목사의 <생수로 채우라>라는 책을 읽는데, 자꾸만 허방다리 짚듯 마음만 겅중거려서 혼났다. 그런 거보면 하나님은 정말 오래 참으신다. 돌이켜 주께 올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시느라 참고 또 기다리신다. 그러니 100세 시대를 산들, 사람들은 오히려 120년의 긴 시간 동안 멀쩡한 시간에 배를 만들고 있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한심할 거였다. 누가 말하길 적당히 하라는 데는 다 그만한 현실이어서 뭐라 반박할 말이 없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그런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말씀이 나를 나무라시는 듯하였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은 어쩌다 그리 된 것이 아니라, 무기를 손에 들고 반역하는 일이다.’ C. S. 루이스는 그렇게 변증하였다. 그러니 '주를 믿는다는 일은 무기를 버리고 손을 들고 투항하는 것이다.' 아, 우리가 가진 이 귀한 영광을 우리가 안다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를 앎으로 허투루 삶을 추구하고 행복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오늘의 현실이 나를 괴롭히는 것에 대해 기뻐할 줄도 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어지러운 마음은 주께 아뢰고, 어떠하든 주께서 얼마나 나를 참고 오래 기다리셨는가를 생각하였다! 내가 또 얼마나 구제불능으로 더는 가망이 없는 존재로 살았던가. 돌아보며 이 모든 게 주의 긍휼하심임을 알고 주께 의뢰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그렇게 오늘 시인의 노래를 입 안 가득 머금고 오래도록 음미한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시 134편 전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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