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한복음 5:30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편 141:3
우리는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저들과 같이 말해서도 안 된다. 말은 생각을 품고 생각은 몸을 움직여 기어이 말이 생이 되는 것을 본다. ‘말이 씨가 된다.’ 오늘 시편은 이를 구한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말이 곧 그 사람이다. 유난히 자주 묵상하는 시편 가운데 73편의 시인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기본 전제를 붙들었다. 그럼에도 이율배반적인 현실 앞에 좌절하고 미끄러질 위기를 종종 느낀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더 잘되는 것을 볼 때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1-3)
그럴 때 우리 속에 왜 여러 갈등과 생각이 없겠나? 하지만 그들처럼 해서도 말해서도 안 됨을,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15).”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의 말은 우리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주를 믿는 자들에게 악행이 될 수도 있다. 나를 보고 주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주를 나타내는 사명을 띤다. 그러니 말(言)이란 고삐 풀린 말(馬)과 같아서 잘 훈련되지 않으면 어디로 뛸지, 언제 내빼버릴지 알 수가 없다.
오늘 본문에 서른여덟 해 병자의 말이 그런듯하다. 하루는 예수께서 베데스다 연못이 있는 행각으로 가셨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 곧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서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 연못은 천사들이 가끔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병에서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거기에 서른여덟 해 동안 꼼짝을 못하는 병자가 있었다. 저의 세월이 말해주듯 그럴 세월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요 5:6). 그럼 그냥 ‘네, 낫기를 원합니다.’ 하면 될 것을, 저 병자는 구구절절 말이 많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우리는 이처럼 사사로운 말이 너무 많다. 주께서 이를 모르실까? 한데 저는 그간의 서러움을 말하느라 지체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거두절미하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 원하는 것을 행하라 하신다. 해야 할 일을 하라 하신다.
우리 안에 걸림이 되는 가장 중요한 습성은 구구절절 말이 많다는 것이다. 앞서 시인도 생각은 많았다. 하나님은 선하심을 알겠는데 현실은 그와 같지 않은 듯 오히려 악인이 더 잘되는 꼴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저는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은 단지 말로써 그치는 게 아니라 움직임의 동력이 된다. 성급하게 말을 입 밖으로 내서 상대적으로 낭패를 본 시인이 있다.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시 116:11).” 저도 고통 중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을 정죄하였다. 성경은 이를 경계하신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이건 참으로 대단한 경지의 훈련이 필요하다. 말이 쉽지 듣는 일은 말하는 일보다 고단하다. 말로 내뱉으면 쉬울 것을 듣기를 먼저 하라는 말씀은 생의 연마를 요구한다.
누가 얼마씩 받고 아이를 맡아주고 데려다주는 이가 있다. 먼 사촌이나 가족쯤 되는 것 같은데 저는 그 잠깐씩 말을 옮기는 모양이다. 아내는 어제 저녁에도 당황하며 그이의 말을 전했다. 아이 아빠가 감옥에 가 있다는 둥, 전에는 아이엄마가 지방에서 몸 파는 일로 돈을 벌고 있다는 둥. 그럴 때면 얼른 저의 말을 버무리며 돌려보내는 까닭은 행여 아이가 들을까 하는 염려이기도 하고 다른 애들도 있는데… 그이가 애를 데려다 주러 올 때면 긴장이 돼! 하는 아내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전에 한 아이가 글방에서 제법 좋은 성과를 냈다. 이런저런 집안 이야기를 하고 듣다보면 그 부모가 참 어지간하다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아이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로 감사를 전하고 아이는 좀 어떤가, 묻는 내용이었는데 뜬금없이 아이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이다. 자기 딸이지만 믿지 않는다는 둥, 뭐가 어찌 영악하다는 둥, 그런 일이 있은 뒤 나는 선입견이 생겨 아이를 대할 때면 알게 모르게 의심하는 마음이 생겼었다.
시편 73편의 시인이 말하기를 더디 한 것은 그 말이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말해버리고 말면 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속 시원하게 그래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말의 유혹은 엄청나다. 오죽하니 지혜자는 남의 말 하는 것을 별식과 같다고 하였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그러니 이는 악순환이라! 속에 쌓인 게 온통 그런 것이니 툭하면 또 험담이다. 이를 욥은 바람에 날아가는 허망한 일로 보았다.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욥 6:26).” 가장 헛되고 헛된 것을 꼽으라면 남의 말이다. 저들이 어떠니저떠니하는 따위의 말은 낄낄거리며 웃어 제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 그 어느 일도 가벼운 말로 던져버릴 것은 없다. 지혜자의 가르침도 그런 의미다.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26:22).” 이를 듣는 자에게는 저의 말이 함정이 될 수 있다. 자칫 어렵게 길을 오르는 데 돌을 굴리는 일이 될 수 있다.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23).”
시인은 굳은 결심을 한 것이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시 73:15).” 그냥 쉽게 말해버렸다면 자칫 주의 아들들을 욕하는 일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하자니 속은 시끄럽고 부글거려 견딜 수가 없으니,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16)” 가장 좋은 비결을 우리에게도 알게 한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 하나님 앞에 토설하는 것, 주 앞에 말하고, 주 앞에서 생각이 많은 것. 그러할 때 자칫 보지 못한 것을 뒤에 가서 알게 된다. 비록 지금은 이해가 안 되고, 말이 안 되는 일 같고, 그래서 억울하고 분하기까지 하지만 우리가 확신하는 것 한 가지는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이다. 이는 값진 훈련이다.
요즘은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무모한 게 주 앞으로 통한다. 종종 나는 내가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이 이러고 생을 탕진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을 느낀다.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그러느라 여러 신앙서적을 보고, 일주일에 고작 하는 일이란 8장짜리 설교원고를 완성하는 것뿐. 하루의 일과에서는 이처럼 아침에 일어나 묵상을 하며 보잘것없는 글을 쓰는 게 전부인데. 마치 이를 위해 전날의 일을 더듬고, 책을 메모하고, 누구와의 일을 기억하였다가 주 앞에 내어놓는 일이 다다. 다들 바빠서 하루를 쪼게 둘로 쓴다 해도 모자랄 세상에서 나는 너무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무모한 나의 한 날은 주가 하신다는 데 주안점을 둔다. 나를 여기에 두시는 일도, 이 일로 하루의 수고를 맡기신 일도, 그래서 때론 무료하고 외롭고 답답하다 해도, 무던히 또 하루 나무를 베어다 껍질을 벗기고 다듬어 방주를 지었을 노아를 생각한다. 가도 가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도 가라 하신 이의 말만 듣고 앞으로 나아갔던 아브라함도, 돼도 않을 것 같은 광야에서 늘 그 타령인 무리를 이끌고 돌고 돌아야 했던 모세도, 저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그와 같은 기본 전제를 붙들고 있었으니, 저들의 무모함은 무던하였던 게 아닐까?
그러할 때, 주가 이루신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사 60:19).” 저들, 세상이 의지하고 바라는 것으로 나의 것을 삼기를 주는 바라지 않으셨다!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20).” 주가 나의 해와 달이 되시고, 나의 영원한 빛이 되어 슬픔의 날이 끝나게 하실 것이다! 그렇듯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21-22).” 내가 이루는 나의 하루가 실은 내 것이 아니고, 내가 마주하는 한 사람이 실은 내가 다루어야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주가 저를 심으셨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이다. 주가 주의 영광으로 나타내실 것이다. 보잘것없는 일 같고 하찮은 한 사람에 불과한 것 같으나,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 결의나 각오로 취하는 약속이 아니다. 이를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보장하시는 것이다.
내 앞의 작은 자, 작은 일로 마음 쓸 게 아니다. 작고 큼은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은 다르다. 저 한 영혼이 천 명을 이룬다. 일당 백이 아니라, 일당 천이다. 그것으로 강국을 이루어 아무도 공격할 수 없는 놀라운 나를 건설하실 것이다. 주님의 약속이다. 그렇게 오늘 주님은 주님이 맡은 일에 대하여도 주의 뜻으로만 여기시고 이루어가셨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하물며 내가 나의 뜻대로 하려 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언제나 생각은 저 혼자 널뛰는 법, 이를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는 파수꾼을 세워야 한다. 말이 먼저면 그 씨를 거두느라 사는 게 고역이라.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그러할 때 말씀은 보장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신다. 나에게 두시는 말의 목적이 있고, 이를 전하여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를 자유하게 하려 하심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그러므로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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