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22:8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28:7
나름 옳다고 여기는 것을 하며 산다. 저마다 자기주장과 그 생각을 따라 여기에 와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 묻는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대체 이 무슨 일인가? 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살았던 날들이 순간 흩어진다. 그럴 때 우리의 의문점에 불러 세우신 이가 답하신다. ‘나는 네가 박해하던 예수다.’ 내가 옳다고 여기느라 멀리하고 외면하였던 것으로부터의 반격이다. 그제야 나의 무능력을 깨닫는다. 실은 어리석었다. 어떤 이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하나 살아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돌이켜 주를 바라게 되면 이보다 더 큰 능력은 없다.
저마다 스스로의 도덕적인 기준으로 살아왔다. 내가 뭐? 이 정도는 어때서? 다 그렇지 뭐! 하는 식으로. 하루는 깜짝 놀라 베드로가 묻는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하고 물러서며 말한다(요 13:6). 어찌 선생이 우리의 발을 씻기려 하신단 말인가? 자신은 그렇게 알고 있지 않았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 앞서 주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7).” 그렇게 우리는 어떤 일에 있어 후에야 알게 된다. 그런데 늘 알면 안다고 여겨서 또 엇나간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9).” 나름은 열심이고 열정인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10).” 몰랐을 땐 몰라서 고집스럽고 알았을 땐 안다고 고집스럽다. 사람 참, 우리의 고집을 누가 무슨 수로 꺾겠나?
‘생긴 대로 산다는 말’이 요즘처럼 무섭게 여겨질 때도 없다. 다들 이런저런 사연으로 힘겨워하는데, 그러면서도 보면 그 고집을 꺾지 못해 어려움을 자초한다. 끝내 나는 살고 내 고집은 허물어지지 않으면…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히 3:10-11).” 여기에서 뿐 아니라 죽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제가 아는 상식과 기준인 모양이다. 문득 생각나는 게 죽은 나사로를 올려다보며 아브라함에게 고하던 어느 부자의 애원이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28).” 죽은 자의 탄원이 가상하기도 하다.
그때도 아브라함이 말한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 산 자의 땅에 모세와 같이 주의 길로 인도하는 자가 있다. 한데 부자는 자신을 알듯 우리의 성향이나 기질을 잘 안다.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 산 자가 말하면 안 들을 게 빤하니까 죽은 자가 가면 혹시 들을 것이란 소리다. 그러나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31).” 아무리 귀신들이 일러 진리를 말하여도 안 듣는 자는 안 듣고 믿지 않는 자는 믿으려하지 않는다. 그게 다 자기도 안다고 여기는 자기고집으로부터다. 그러니 ‘생긴 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어려운 일인가? 다들 처한 그 와중에도 자기 고집대로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공격하려하지 정작 자신을 돌아보아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더하신다. 고난을 통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이다. 어려운 현실에서는 저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도우심을 바란다. 비로소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1664년 영국의 물리학자 뉴턴이 살던 도시에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모든 대학들이 문을 닫자 뉴턴도 캠브리지 대학을 떠나 시골 외갓집으로 피신을 갔다. 거기서 ‘빛의 신비’, ‘만유인력’, ‘미적분’이 탄생한 것이라 한다. 어제는 조봉희 목사의 <고난은 악이 아니라 약이다>(교회성장연구소)를 읽으며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려움이 우리로 은혜를 은혜답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친구는 요즘 부친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지켜보면서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 눈물을 흘리고는 한다. 어려움과 고난이 비로소 우리의 단단하기만 한 고집을 헐렁하게 한다. 마치 겨우내 꽝꽝 얼었던 흙이 봄기운에 헐거워져 새순을 돋게 하는 것 같다.
오늘의 슬픔과 고통이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는 주의 은총을 알게 한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눅 1:74-75).”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름 한다고 하고 산다고 살며 열심으로 꾸려온 인생인데, 그러는 동안 얼마나 단단하게 굳어져 주의 뜻을 외면하고 멀리하며 살았던가? 그때에도 그때마다 주의 도우심과 자비하심은 엄연하였는데, 미처 우리는 알지 못했다. 우연으로 치부하고 설마, 하는 안일함으로 무심하였다. 그럼에도 주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나는 어느 날 내게 왜 그와 같은 은혜를 더하고 더하셨는지, 주의 은혜로 감격하였다. 곧 <어느 날 나는 죽었습니다> 하는 누구의 청소년 소설 제목처럼 나는 죽어야 내가 산다. 이를 알지 못할 땐 고통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한참 아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 자주 인용하였던 인물 닉부이치치는 선천적사지절단증으로 태어나 팔다리 없는 장애를 안고 살았다. 훗날 저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은 내게 기적을 보여주시는 대신 나로 하여금 기적이 되게 하셨다.’고 고백하였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세상이 우리를 이기지 못하게 하신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문득 돌아보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감사가 나올까? 하고 스스로 놀란다. 전에는 가소로운 일이어서 늘 사사롭게 넘겨 우연으로 치부하고 말던 일이었는데, 우리로 그 사랑하시는 이를 힘입어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이를 알면 알수록 닉부이치치의 고백처럼 내가 곧 기적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아는 내가 아니다.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닌 것이다. 누구의 아픈 사연을 접하며 때론 내가 먼저 몸의 반응으로 전이되어 설사를 하거나 가슴이 옥죄어 진정제를 삼켜야 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저들의 사연이 나로 하여금 주의 은혜를 더욱 갈망하게 한다. ‘주가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다.’ 어제는 그렇게 누구와 또 누구와 통화를 하고 어려움을 듣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주로 힘입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살아서 죽음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죽어서 산들, 그제는 후회와 탄식뿐이다. 마른 목구멍에 물 한 방울을 갈망하다 죽은 나사로를 돌려보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일가에게 이 소식을 알게 하고 싶은데… 더는 기회기 없는 순간을 묵상하면 오금이 저리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아차, 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욥 22:16).” 이보다 더 끔찍하고 불쌍하고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이 땅에서 오년 십년을 더 산들? 다시 회복되어 일상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한들? 그 또한 곧 허물어질 장망성에 불과한 것인데, 여기는 다만 파멸의 도성이다.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사 19:18).”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다.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것이 지혜다. 오늘의 이 모든 상황에서 감사라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그것이 좋을 때나 싫을 때나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시다. 우리로 더욱 이롭게 하시려고 오늘도 모든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신다. 주를 알면 알수록 주의 선하심을 고백하게 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1).”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서 죽이시려는 것은, 사탄이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어쩜 그러고 살았을까? 나는 늘 나의 지난날을 돌아볼 때면 부끄럽고 두려울 뿐이라, 누구의 어려운 소식을 접할 때면 부디 저의 고통이 저로 하여금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깨달아 알게 하기를 위하여 빈다.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오늘에 처한 현실로 끝이 아니다. 그러다 극단적 선택을 할까, 노심초사 마음이 어렵기도 하지만. 그럴 사람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는 주의 사랑하시는 자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그러므로 오늘 바울은 얼마 전의 사울이 아니다. 다소의 사울이 주의 종 바울이 되었다. 죽음도 불사하며 주의 복음을 전한다. 누구보다 열심으로 살던 자신을 설명하며 그것이 얼마나 헛되었는지를 간증한다. 곧 우리의 공통된 사실 하나는 날마다 간증이 된다. 나의 이 묵상글도 매일이 그날인 것 같은데 하루하루가 간증할 게 참 많다. 왜 주인이 내게 일일이 설명하고 마음을 다해 잘해주겠나? 저가 결코 나를 보고 하겠나? 우리 교회로 이득을 얻으려고 하겠나? 주께서 그리 범상치 않게 하심이다. 함부로 여기지 못하게 말이다. 어제도 복도에서 마주치자 곧 공사가 시작될 것에 대해 마치 직원이 상사에게 보고하듯 일정을 설명하는 것을 들으며, 왜 이이가 내게 이러는가? 하는 것을… 내 뒤에는 주가 계심이었다.
바울이 로마인이어서 백부장도 천부장도 주춤하였겠나? 그 이상의 존재인 것을 하나님은 증명하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까지 알지 못한다 해도, 알지 못함으로 주가 발을 씻기려 하실 때 자신의 도적적인 기준으로 거절한다고 하여도, 이것이 외형적으로는 예의범절이고 도덕적인 자세이겠으나, 어리석은 것이다. 안다고 우리가 엇나가지 않았나? 온 몸을 씻겨 달라며 구원도 자기 잇속으로 생각한다. 아,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6-18).” 그랬던 우리로 주의 사람이 되게 하셨다. 주님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자로 살게 하셨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다. 곧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시 28:8).” 이 놀라운 손길을 왜 우리는 고통으로만이 알게 되는 것일까?
부디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9).” 그러할 때,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 주가 주시는 가장 큰 은혜이다. 이에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시 28:6).”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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