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사도행전 24:24-26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4-5
일상과 상관없는 말씀은 없다. 말씀은 생활이다. 바울은 있는 그대로 전하였고, 저를 판단하는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은 처한 상황에서 행하였다. 곧 벨릭스는 말씀을 회피하였고 혹시나 하고 돈을 바랐다. 같은 민족 지도자들은 어찌하면 자신들을 위협하는 바울의 도를 치울까 하였고 바울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훗날에 저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하고 주의 깊고 놀라우신 섭리를 삶으로 인정하였다. 현실은 때로 축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오히려 축복이고, 축복인 것 같은데 오히려 저주가 되곤 한다. 유리한 것 같은데 불리하였고 흥하는 것 같은데 망하였다. 이럴 때 우리 믿는 자의 특징은 고통에서도 꿀을 빤다. 하나님은 종종 손을 어긋맞게 하여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가르신다.
요셉의 뜻과는 달랐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창 41:51-52).” 우리는 고난 중에 났다. 그러나 우리로 고난 중에서 번성하게 하신다. 좋다고 여기는 것이 좋지 않을 수 있고 안 좋다고 여기는 것이 좋은 게 되고는 한다.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48:17).” 그리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49).” 오늘의 수고가 우리로 주를 더욱 사모하고 바라게 한다.
요나는 이를 물고기 뱃속에서 깨달았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 2:4).” 늘 고난의 대명사 같은 인물 욥의 입에서도 고백되는 말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저들의 공통점은 고통 가운데서 꿀을 빨았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시 60:9-10).” 우리의 고통은 우리로 절규하게 하지만 이내 심지가 곧은 자로 세우신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오늘 우리가 처한 시국이 이래저래 고단하고 힘든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극명하게 두 갈래 길로 갈린다. 제 갈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그러해서 더욱 주께로 나아오는 사람들로 말이다.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시 107:23-25)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를 쓰고 이처럼 말씀 앞에 앉는 까닭은 말씀으로가 아니면 나의 나 됨을 이길 수 없고 곁의 여러 상황을 깨달을 능력이 없다. 깨달음이란 도달한다는 것으로 왜 내게 이와 같은 상황을 주시는지, 범사에 주를 인정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은 이르신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그러니 우리 안에 이는 회의와 갈등, 염려와 근심을 무슨 수로 당해내겠나? 나름은 이런저런 묘책을 강구하지만 나는 이제 주의 말씀으로 뿐이다. 이를 좀 더 살펴보면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8).” 어느 누구도 한결같은 자세를 유지할 수는 없다. 그럴 때마다 사람이 다 그렇지 뭐, 하는 식으로 타협할 수도 없다. 다들 그러고 살아, 하고 자신을 두둔하기 시작하면 더는 말씀과 가까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처럼 말씀의 약속보다 남들의 도모가 훨씬 더 빠르고 설득력이 있다. 저들과 함께 하는 것이 마음에 안정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느 무리에 속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9-10).” 인생의 결국은 같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란 그뿐이어서 오히려 어려움이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는 유익이 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곧 우리에게는 기약할 후일 곧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하시는 게 말씀이다. 세상과 성경의 차이다. 당장은 그게 나은 것 같아도 성경은 저쪽의 복을 바라보게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고,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욥 10:16).”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복이었다. 종종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의 권할 말은 그것뿐이다.
지금의 ‘코로나 정국’이 나쁘지만은 않다. 서로의 거리두기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계기도 된다. 너무들 밀착관계로 살았다. 어제는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다시금 상기하였다.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시 50:1-2).”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는 빛으로 느낀다. 세상의 이런저런 일들을 비추시며 하나님의 역사와 살아계심을 알리신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3).” 그러할 때의 일이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4-5).” 오직 우리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다. 가령 점심을 먹고 천천히 걸어서 다시 교회로 갈 때면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는데 정문 앞에는 엄마들이 마중 와서 학교 파하고 나오는 아이들을 기다린다. 그럴 때면 엄마들의 눈에는 자기 아이 뿐이었다. 그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한 아이만 바라보고 눈길을 떼지 못한다. 아이도 저만치서 엄마를 발견하고는 실내화 주머니를 흔들어대며 뛰어온다. 마스크로 입을 가린 상태에서도 엄마는 아이의 가방을 대신 들춰 메고 한껏 허리를 숙여 아이와 뭐라 이야기를 하며 지나쳐갔다.
마치 그와 같아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4)”…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5)”… “내 배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하고 불러 모으신다. 그런 뒤 힘주어 잡으신다.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라(7).” 일련의 이런저런 우리의 상황을 두고 나무라지 않으신다. 이는 모두 주의 것이다(8-13). 다만 우리로 하여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라고 하신다(14). 그에 따른 증명으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5).” 성경이 아니면 우리는 어디에서 주의 음성을 듣겠나? 악인은 그럴 수 없다. 그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1:4). 저들의 특징은 뚜렷하여서 알면서도 가증스럽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50:16).” 곧 몰라서 주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뒤로 미루는 까닭이다. 먼저는 곁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남들 다 그렇지 뭐, 하고 말면 더는 가망이 없는 것은,
첫째, 말씀의 교훈은 싫고 이를 뒤로 하게 돼 있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17).”
둘째, 저도 모르고 누구와 같이, 어디에 속한 것으로 안도한다.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18).”
셋째, 이는 어쩌다 죄가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이었고 이를 언제부터는 주도한다.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19).”
넷째, 그렇게 하여 제 밥그릇에 침을 뱉는 격이 된다.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20).”
다섯째, 그러면서도 무뎌지는 까닭은 승승장구하여 하는 일이 즐거운 성과를 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21).”
곧 하나님이 모르실 줄 안다. 본래 그러한 자로 살다 그러한 자로 죽는 영혼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나?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전혀 주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까닭은,
여섯째, 어쩌다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곧 죽음 너머의 심판을 잊고 살았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22).”
그것 때문에도 아삽은 이 시를 노래하였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4-6).
학교 앞에서 엄마는 자기 아이를 만나 아이의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풀어 자신의 어깨에 멘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오늘 어땠니? 하고 묻는다. 곁에 다른 아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와 같으시다. 저와 상관없는 자에게는 오늘 어땠니? 하고 묻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 자기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악인들의 특징을 따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1:4-5).” 그리하여 아삽은 우리 모두의 결국을 들려주고 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5).
곧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까닭이고, 현실에서 부주의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증거로는 우리로 말씀 가운데 거하게 하심으로다. 이 시는 아삽의 시다. 아삽은 삼대 악장으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찬양자였다(대상 6:39, 15:19, 16:5). 아삽의 시로는 시편 50장과 73-83장까지가 있다. 삼대 악장으로는 아삽과 같이 여두둔이 있다. 저는 다윗이 등용한 레위 지파 므라리의 자손이다(대상 25:1-3, 대하 35:15). 저의 시편으로는 39, 62, 77장이다. 또 한 사람 헤만은 유다지파 마홀의 아들이다(대상 2:6). 저의 시편은 88장이다. 그의 아들 열네 명이 성전에서 봉사하였다(25:4-6).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선견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로 충실하였다.
이와 같은 자료 조사나 본문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 나의 일이어서 나는 감사하였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바로 알고 더욱 주와 가까이 하고자 하는 마음을 더하시는 것에도 복에 복을 더하심을 알았다. 그야말로 은혜 위에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나만의 특권이 아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우리 모든 믿는 자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주의 백성으로서의 마땅한 권세였다. 고로 우리의 역할은 오늘 본문의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시 50:6).” 하는 고백의 삶이 증명되어야 한다. 고로 오늘 시편, 다윗의 진술에 귀를 기울인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30:6).” 이를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10).” 이는 곧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 그러므로 나의 하루하루에서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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