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전봉석 2021. 4. 21. 06:06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사도행전 23:23-24, 32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29:11

 

 

우리가 할 일은 주를 의뢰하고 내어맡기는 것뿐이다. 이는 어린 아이의 특징으로, 아이는 다만 그 부모를 믿고 의지한다. 염려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어맡김으로 증명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은 기이할 정도이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지키는 로마 군인들을 보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이한 일을 본다. 저의 백성들은 사두개파니 바리새파니 서로 갈려 말에 말을 이으며 저를 죽이려 하나 오히려 적국의 손에 의해 저를 보호하신다. 이를 시편은 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우리는 한 쪽 면만 본다. 무엇을 통하지 않고는 다른 쪽을 알 수 없다. 이때 무엇으로 바랄 것인가? 요즘은 온통 막말과 악담의 시대다. 기껏 그 당의 대표로 있던 이가 자신이 머물렀던 곳을 두고 이런저런 말을 한다. 누구는 대놓고 이를 업으로 삼는다. 전문용어로 이런 자를 ‘프로보커터’라 한다. 도발자, 선동자란 뜻으로 해석되는데 시쳇말로 ‘관심 종자’를 일컬어 ‘나쁜 관종-어그로’라 한다. 어그로는 인터넷에서 자극적인 글로 문제를 일으켜 의도적으로 관심을 사는 부류다. 저들은 막말과 도발로 밥벌이를 한다. 모 개인방송 유튜브는 한 해에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렸다. 그 대표로 있는 이가 대통령을 빨갱이라 선동하여 어느 시민단체의 고발로 48시간 임의동행 형식으로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틀 동안 저가 받은 후원금이 수천만 원이 넘는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저들의 특기는 ‘모두까기’다. 나름의 논리로 같은 진영의 사람들에게 쾌감을 주는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다 돌연 ‘돌려까기’로 자기를 지지하던 사람들을 씹어댄다. 그러는 사이 반사이익을 보듯 양쪽 모두의 주목을 받는다. 그야말로 ‘관심 종자’들이 판을 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보지 못하는 면을 주시한다.

 

선동이 왜곡을 낳고 왜곡이 반감을 일으켜 서로를 겨눈 총부리가 같은 민족에게 더욱 가혹하다. 저들은 주목 받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정치와 연예 시장은 예전에 이미 저들로 오염되었다. 조작꾼들에 의해 판이 커졌다 작아졌다, 부풀려졌다 꺼졌다 한다. 새삼 이런 현상을 두고 뭐라 언급한 까닭은 우리 영혼이 이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누구는 백신을 두고 정부를 욕하고 행정당국이 하는 일에 부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는 걸 보면 저들에게는 더 악화되고 더 큰 혼란이 호재만 같다. ‘거 봐라’ 하는 식으로 말에 말을 더해 말로 빌어먹고 산다. 그러니 어쩌자는 것인지! 뱉어놓고 시시덕거리며 말품 팔고 사는 ‘나쁜 관종’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안에 염려와 근심은 이 터 위에 뿌리를 내린다. 가령 돌아오는 토요일에 아내는 돌봄 우선 접종군으로 분류 돼 백신을 맞아야 한다. 그런데 어제는 47세 된 간호조무사 누가 앞서 백신을 맞고 사지가 마비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이에 서로의 연관을 두고 보도가 이어졌다. 나의 염려는 말할 것도 없고 아내의 걱정 또한 깊어졌다. 이처럼 ‘세상은 요지경이다.’

 

당장 우리가 보는 것은 못 보는 다른 쪽으로 불안이 가중되고 이를 이용해 ‘말(言)밥’으로 먹고 사는 여러 보도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데,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우리의 일은 주를 신뢰하고 오직 주만 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맡겨놓고 미덥지 않아 안달을 부리고 나서서 뭐라도 하려 하니까, 배가 산으로 갈밖에. 그러니 어찌 해야 할까?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나는 죽어야 하고 내 안의 그리스도는 사셔야 한다. 믿고 맡기는 게 우리 일이다. 무엇을 행하는 데 있어 우리의 무던한 노력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이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도록 우리는 자꾸 힘을 빼야 한다.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행 19:36).”

 

이를 성경은 우리에게 풀어주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곧 우리는 진흙이다. 진흙은 빚으시는 데 따라 가만히 있으면 된다. 토기장이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저의 손에 우리를 맡김으로 저가 주무르시고 다지고 깎아서 쓰시기에 합당한 용도의 그릇으로 세우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그 용도는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다. 옹글고 내맡겨진 흙으로 그대로 잠잠히 있어드리는 게 우리 일이다. 이게 죽겠다! 내 의지로 안 돼, 나는 약을 복용하면서 나를 진정시킨다. 물레 위에서 돌려지고 다듬어질 때 이를 못 견뎌하다 쓸모없이 버려지면 굳어져 발에 밟힐 뿐이다. 곧 주를 신뢰함이란 나의 나 된 약함까지도 주의 선하신 뜻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를 잘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안 되니까, 한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면서 염려와 근심을 이고 지고 주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믿음으로 구원에 방주에 승선하고서도 미덥지가 않아 여전히 짐을 이고 지고 내려놓지를 못하고 출렁거리는 세파에 시달린다. 늘 나는 나의 약함을 가지고 주 앞에 엎드린다. 아내가 백신을 맞는 일도, 아들이 공부에만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 딸애의 수고가 안쓰러워… 곁의 누가 무슨 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저의 말을 전해 듣고 내내 같이 안달을 떨다 안정제를 삼켜가면서도… 그래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주께 더, 더 내어맡기는 것이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어제도 가정 예배드리기 전에 그와 같은 일련의 뉴스를 괜히 말해서, 아내는 염려가 앞서고 나는 걱정이 가중되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러니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뢰고 고하며, 있는 그대로, 나의 이 부족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성품 그대로 주께 아뢰었다. 우리의 수고는 주 앞에 더 가까이 가게도 하고 더욱 완고하게 멀어지게도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와 같은 말씀으로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무슨 수로 살까?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시국이다. 어려울수록 사람들의 본성은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를 즐기는 사탄은 막말과 악담을 필두로 하여 사람의 마음을 후벼대어 믿는 자의 형태도 망가뜨리려 애쓴다. 잘 갈리지 않은 흙으로 토기장이는 진흙을 다지다 거치는 알갱이를 도려낸다. 그럴 때면 진흙의 입장에서 너무 견디기 어렵다. 아프고 서럽고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할 일은 맡김으로 믿는 것이다. 이 일이 우리 믿는 자의 일이다. ‘알아서 하세요!’ 하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그러할 때 신기한 것은 감사로 주께 아뢰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쪽에서는 저쪽을 알지 못한다. 전해들을 수밖에 없다. 저쪽에서도 이쪽을 모르니 억지 추측이 난무하다. 온갖 말이 오가고, 이와 같은 시장이 형성되어 더 자극적이고 선동적이고 악의적인 말들이 주목 받는다. 그것으로 돈벌이를 한다. 돈이 벌리면 벌릴수록 더욱 대담해져서 말로 누구를 조져 묵사발을 내기도 한다. 이에 열광하는 시대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가장 좋은 수는 염려를 안 하면 되는데, 염려가 없을 수 있나? 이에 그 염려를 묶어둘 수는 있어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그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귀한가를 알리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반문하시는 것이다. 하물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염려와 근심으로 앞서 쩔쩔매는 나에게 주의 음성은 부드러우셨다. 왜?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

 

우리는 오직, 어린 아이와 같이 믿음으로 산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그러므로 염려까지도 묶어 맡긴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7).” 그러할 때 오늘 바울의 기이한 현상처럼, 도리어 로마 군병들이 저를 호위하며 보호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役事)가 일어난다.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것, 내어맡김으로 주신 한 날의 수고로 족하고 어떠하든지 평안할 따름이다. 내어맡김으로 믿음이 자라고,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자라나는 믿음으로 놀라운 선물이 깃든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 우리에게 주심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3-6)

 

이에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시 29:1).” 우리의 권능이 무엇이겠나? 주를 신뢰하는 것이다. 주만 믿는 것이다. 믿음으로 예배하는 일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2).” 아무리 거친 세파가 요동친다 해도,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3).” 주의 소리가 세상의 온갖 잡소리를 삼켜버리신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4).” 말(言)들의 전쟁 가운데서 저들의 악담과 지껄임을 꺾으시고,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5-7)

 

그렇게 우리의 공허한 불안과 근심의 한복판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진동한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8).” 고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