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사도행전 25:23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편 31:24
세상 권세가 우리를 압도한다. 어려운 처지와 상황이 우리로 좌절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 주를 두려워함으로 그가 베푸시는 은혜를 맛보아 안다.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20).” 여러 형태로 어려움과 고통이 우리를 위협한다. 참으로 고단한 현실에서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107:28).” 뭘 어찌 해야 할지, 옴짝달싹 못하게 난감할 뿐인데,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29-30).”
이를 보면 인생의 굴레에는 규칙이 있다. 각 단계가 있고 우리는 결코 예외가 아니다. 먼저는 탄식이다. 믿는 자의 어려움도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1-2)
그러나 우리의 탄식은 혼잣말처럼 헛되지 않고 바람을 잡는 일처럼 허망하지도 않다.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탄식은 탄원이 되어 주를 부르고, 뒤이어 기도가 된다. 여기서 보면 슬픔과 고통에 젖어 어려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다린다. 기다리는 데 지쳐 그 어려움을 호소한다. 연거푸 네 번씩이나 반복하여 ‘어느 때까지인지’를 묻는다. 믿는 자의 슬픔은 그 근원에 주를 바라는 마음이 함께 있다. 이것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탄식은 탄원이 되고 탄원은 기도로 바뀐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3-4)
이에 두려워하는 것 몇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죽음이다. 육신의 죽음과 동시에 주를 바라는 마음이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하나는 나의 원수가 승리할까 함이다. 그 원수는 세상 권세로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자들이다. 즉 우리를 쥐고 흔드는 사탄 마귀다. 하나는 이에 우리가 흔들려 대적들의 조롱거리가 될까 함이다. 그로 인해 주의 영광을 살피는 곳으로까지 나아간다. 이처럼 기도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우리를 주 앞으로 이끈다. 일찍이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실을 베드로에게 알리셨고, 그러나 결코 믿음을 잃지 않도록 주께서 친히 중보기도하심을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곧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주 앞에 바로 세우는 것 같으나 실은 주께서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하심이었다. 이에 우리는 찬송의 단계로 나아간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 13:5-6)
어려운 중에 주의 은혜를 선명히 본다. 누구와 통화하며 저의 상황을 듣다 나는 질식할 것 같았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있었다. 누구의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고통 중에도 꿀을 빤다.’ 오늘 시편의 화자도 다를 게 없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31:5).” 기도를 통해 주를 찬송하고, 탄식이 탄원으로 바뀌면서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6).” 우리의 믿음은 더욱 굳건하여진다. 이를 위해서도 낮아짐은 은총이다. 그렇게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이 놀라운 진리 앞에 서는 자는 복이 있다. 곧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10).” 인생이 다 그러하여서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 우리는 우리 의지로 설 수 없다.
믿는 자의 삶도 안 믿는 자의 삶과 다를 게 없다. 어려움과 고통은 꽃이 시들고 아름다움은 사라지는 것과 같이 쇠잔할 뿐이다. 인생의 보편적 현상 가운데 가히 짐작도 못할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었으니, 우리는 그런 가운데서 주를 찾고 주가 함께 하시는 손길을 느끼고 찬송한다는 것이다. 누구와 통화하다, 저가 처한 상황으로 나는 안타까울 따름인데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찾고 의지하며 주께서 함께 하심을 고백하는 것을 들으며 장하다, 훌륭하다 하고 되레 내가 은혜를 받았다. 어디서 우리에게 이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이는 엄연한 성경의 보증이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2-13).” 굳게 서서 당당히 걸어갈 수 있다. 주가 그리 하신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는 당장의 일로 힘에 겨워하나 이 너머 주가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궤도에서 우리는 점점 더 주께로 나아간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
오전에는 이처럼 누구와 통화를 하고 저를 권면하다 내가 위로를 받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안다. 이를 위해서도 아침에 이처럼 일으키시고 말씀 앞으로 나오게 하시는 거였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우리는 무엇으로 새 힘을 얻을까?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다들 잘난 줄 알고 자기 뜻과 자기 의를 따라 살아가는 세월이지만… 바울을 둘러싼 세상이 요동칠 따름이지 정작 바울은 고요하였고 평안하였다. 이를 욥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욥 10:16).” 당장 나는 움키고 뜯겨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으로 끝장날 것 같지만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17).” 그러는 중에서도 이 모든 일의 주체가 주님인 것을 알면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12-13).” 앎으로 주의 기이한 능력을 기다리는 것이다.
미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반전이 있을 것이다. 힘들어 죽겠어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는데, 우리 네 자매들이 모두 주를 찬송하며 경배하는 날이 오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오는 거야! 하는, 전화 저편의 고백으로 나는 놀라웠다. 오늘 이 어려움의 가장 큰 수혜자는 너구나! 믿음대로 될 거야! 하고 나도 모르게 위로하였다. 행여 우리의 바람이 말로 그치는 것 같으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고, 끝나도 끝난 게 아닌 것이 우리 성도들의 결말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8-40).” 이런 사람이 누구인가?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이다. 믿음이란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꿈꾸고 소원하며 주를 바라는 맹랑한 자들이다. 이를 더러는 비웃고 한심하게 여기지만 이 한 세월의 끝을 바로 안다면 그 허망함에서도 웃음이 나올까? ‘이런 사람은’ 그 너머의 놀라운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굳이 세상 권세 앞에서 변명하고 비굴하게 살고자 애원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앞서 주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처한 어려움과 우리로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을 발로 밟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25-27).” 즉 이 모든 일로 우리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이 복음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것으로 오늘 우리에게 나타내시며 장차 도래할 영원한 영광의 세세 무궁함을 알게 하신다.
그런 와중에 우리의 고백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 16:23-24).” 우리의 놀라운 반전은 아직 시작도 안 됐다. 오히려 우린 지금 아주 조금씩 맛보아 알 따름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 6:18).” 우리는 빌고 또 구하며 서로를 축복한다. 아,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시 31:3).” 오늘 시편의 찬양도 그러하였다.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1-2).” 고로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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