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54:4
우리로 주께 이끄신다. 그 모양과 여건은 다양하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우리를 아버지께서 주신 자로 받으신다. 성가셔하거나 멀리하지 않으신다. 그 모양이 어떠하든, 그 지경이 어떠하든, 우리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하신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누구는 병마에 시달리며, 어떤 이는 실패로 낙심하여, 어떤 이는 외로움에 몸서리치다, 아버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자인 것을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확답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그 증거는 옛 생활을 버린다. 우리의 옛 생활은 불의였다. 이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통회하고 자복한다. 이것이야말로 참 쉬운 일인 것 같은데 아무나 그러지를 못하는 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사 64:7).”
곧 주가 아니시면 우리로 주를 찾을 수 없게 하셨다. 스스로는 불의를 불의로 알지 못하고 악의를 악의로 보지 못하는 것이어서, 죄악으로 소멸되게 하셨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했음에도 ‘누구든지’가 아무나 그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고통 중에라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로 기도하게 하신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실질적으로 좋을 때나 괜찮을 때는 이에 무디다. 무감각하여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를 못한다. 그러나 병이 들고 실패하여 외로움으로 신음하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의 죄성은 참으로 끈질긴 것 같다. 그래서 또 그럴 때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호 7:14).”
말씀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씀 안에서 나를 주께 의탁하는 것이 복이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임하셨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예수님은 이르셨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마 13:24)” 우리는 결국 그 열매를 거둘 것이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오늘 우리가 어떠하다 해도 이를 붙들면 기쁨으로 씨를 뿌릴 수 있다. 우리는 이를 맡은 자들이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내 곁의 사람들로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 이는 충성으로 증명된다. 일관됨과 한결같음으로 충성은 나타난다.
이를 위해 다윗은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이를 앎으로,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66:17).” 이는 죄를 여전히 품고는 그리할 수가 없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18).” 우리로 그리할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어려움도 두신다. 고통과 염려도 허용하신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시 16:1-4)
곧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내가 그것을 거절하며 불우하게 살았던 날들을 통회한다. 돌아보면 자복할 것뿐이다. 적당히 괜찮다고 여기던 것들로부터 벗어난다. 곧 우리의 신실한 기도는 그러므로 막다른 길에서 터져 나오는 외마디 비명과 같다. 우리의 탄식을 주가 들으신다. “…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8).”
스스로 적당하다고 여길 때는 이런 말씀이 크기 와 닿지가 않는다. 사람 참, 본질적으로 끈질기고 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기어이 고꾸라져 넘어뜨려서야 ‘살려주세요.’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종종 나는 육신의 고통으로 이와 같은 나의 악함을 고백한다. 어려움과 좌절로 이내 주 앞에 승복하게 되는 것이다. 곧 우리의 고통과 질병은 이유가 있다. 우리로 주를 바라고 돌이켜 주를 섬기게 한다. 주의 자녀인 것을 알린다. 이때에 가장 큰 지혜는 즉시 돌이키는 것이다. 그때에 주님은 우리를 일으키신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수 7:10).” 하고 우리를 돌이켜 고치신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렘 3:22).”
종종 나는 또 내 곁의 누가 아플 때, 어려움을 겪을 때 저로 인해 두려움을 알게 되고 주께 나를 돌이키기도 한다. 가까운 친구의 여러 어려움을 보았다. 어쩌면 신대원을 결심하게 된 계기도 그 직전의 일이었다. 갑자기 시력을 잃을 수 있다는 병원의 진단과 함께 이를 위한 약물치료 부작용으로 두 골반 뼈가 괴사하여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을 겪으면서 당사자는 물론 나는 겁을 먹었다. 두려움이 주를 찾게 하였다. 그때를 돌아보면 매우 극적이다. 나에게는 가장 애착 관계로 놓지 못하는 것들부터 하나씩 무너뜨리셨다. 간신히 지켜오던 물질을 치셨고, 가장 어쩌지 못하며 애지중지하는 아들을 멀리 떨어뜨리셨으며, 내 안의 자존감을 일거에 허무셨고, 이내 질병으로 고삐를 틀어쥐시었다. 그때 알았다면, 모든 질병과 실패와 좌절과 낙심은 공연히 들이닥치는 게 아니었다. 끝으로 가까운 친구들과 늘 의지하던 사람들을 모두 떨어뜨려버리셨다. 이때 나의 죄를 의식함으로 고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주만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히 12:2).” 이는 극히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의 공통된 일이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저들도 이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 주를 향해 달려나갔다.
나는 현재 내 곁의 어려움을 겪으며 호소하는 이들에게, 또는 날마다 때론 힘에 겨워 몸뚱이 하나도 건사하기 어려워하는 나 자신에게, 이와 같은 사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안겨주고 싶다. 이로써 하나님께 쏟아놓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수 7:26).” 우리 안의 ‘아간’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죄의 뿌리다. 설마, 하는 안일함의 처사이고, 다들 그러는데 뭐! 하는 자기 타협에 제동을 건다. 나는 가끔 나의 약함을 감사한다. 실은 흔쾌히 감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제 같은 경우도 비가 내리면서 온 몸이 아팠고, 고혈압 약을 바꿔서 그런지 내차 어지러워 울렁거리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몸이 나를 늘 제압하는 신세라, 뜨거운 핫팩에 허리를 지지며 괜한 서러움에 마음이 어렵기도 하다가 그러니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를 부르다 곁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생각하였다. 나의 약함이 나로 충성하게 한다.
그와 같이 약한 데는 보화가 숨겨져 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물론 싫지만, 힘들고 힘에 부쳐 지칠 때도 있지만, 솔직히 그때가 아니면 언제 또 간절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겠나? 그와 같이 나의 약함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능력’ 곧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나를 도우실 자로 부르고 섬기게 하는 것이다. 이를 오늘 시편은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하는 고백으로 이끄시는 게 아니겠나? 그러므로 더는 자책하지 않는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오직 나를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에 주의 심판이 두렵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의 영원한 대언자가 되심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곧 하나님도 나를 판단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나의 죄를 이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하셨기 때문이다. 곧 오늘의 질병이나 어려움이 유익한 까닭은 이와 같은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주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로는 감당할 수 없는 우리 스스로의 문제를 말이다. 주께 맡길 수 있는 기회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때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
곧 오늘 한 날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다. 고로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 54:1).” 주는 반드시 나를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2).”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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