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편 56:4
성령으로가 아니면 모든 게 허사다. 나의 열심과 나의 수고는 쓸모없이 버려질 따름이다. 곧 내 안에 주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어째서 이 위대한 역사가 쓸모없는 것이 될까? 인생의 행보는 어쩔 수 없다. 슬픔 뿐, 쉼이 없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그 의미를 새기다보면 그렇지, 하고 저절로 통감하고는 한다. 내 힘과 내 의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내 안에는 온통 죄를 바라고 세상을 원하는 것뿐이어서, 오늘 말씀의 간곡한 의미에 가슴 저민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스스로들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느라 ‘페미’니 ‘젠더’니 하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양분된다. 그렇듯 나름의 주장으로 고상을 떨다가도 들추고 나면 온갖 더러움이 그 안에 가득할 뿐이다. 세계적인 부호로 가치 있고 늘 옳은 편에 서서 마치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것’처럼 굴던 이가 꽤 오래 전부터 직원 가운데 누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전직 대통령의 며느리와 딸이 자신들을 경호하는 이와 그런 관계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저들은 버젓이 태연하게 굴었다. 이와 같은 소재는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고 대중의 대리만족으로 돈벌이를 한다. 건물은 층층마다 퇴폐업소가 성업중이다.
그런 현실에서 오늘 말씀은 왠지 모를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과연 우리는 이를 얼마나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 몸을 가지고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가치에 헌신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한데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내 것이 아닌데 동성애니 이성애니, 무슨 사랑이니 무슨 연애니 하며 ‘나의 것’인양 구는 꼴이 가관이라.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과연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럴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사람으로 살면서 그런 이의 추구와 가치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전도서의 말씀처럼 인생은 슬픔뿐이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쉼을 얻지 못한다. 그뿐인가? 평강이 없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8).” 있으면 있어서 고단하고, 없으면 없어서 피곤할 따름이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어디로 행할 것인지 굽은 길뿐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저마다 자기주장이 옳다 하고 사는 꼴인데, 이를 목도하고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말씀은 길이 참으라고 이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때가 가까울수록 온갖 헛된 것들이 기승을 떤다.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눅 21:8).” 이래저래 미혹되기 쉬운 세상이다. 정보화시대에 넘쳐나는 정보가 독이 되고 있고, 소셜미디어(SNS)로 서로가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온갖 더럽고 추잡한 것들이 성행하고 있다. 널린 학식으로 신앙이 좀 먹고,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보장되면서 추잡한 짓들이 이목을 끈다. ‘너희는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하시는 말씀의 당부를 알겠다. ‘미혹 받지 않도록 주의 하라.’ 하시는 경고음이 크다.
우리는 어찌 해야 할까?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씻음을 받은 자이면 씻음을 받은 자답게 깨끗함으로 주께 나아가자. 이와 같은 말씀을 옮겨 적으며 나를 다시금 다잡는다. 다들 사느라 정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 사느라 아등바등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지 않도록 주의하며 주신 바,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 알고 사는 것이 복이었다. ‘한 가난한 소녀가 있었다. 저에게는 금이 간 양동이가 전부라 그것으로 매일 물을 길어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살림을 꾸려나갔다. 하루는 금이 간 양동이가 물었다. 왜 금이 간 나로 인해 일을 두 배나 힘들게 하세요? 그러자 소녀는 길가의 꽃들과 집안의 향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금이 간 틈으로 새는 물 덕분에 길가에 꽃들이 잘 자라고 그 향기가 우리 집에 가득하지 않니!’ 어디서 읽은 우화인데 마치 오늘의 나와 주님의 대화를 연상케 하였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생활로 살고 있는가? 생각하였다.
세상이 아무리 난다 긴다, 저 잘난 맛에 산다 해도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게 하심이다.’ 내가 무엇을 내어놓으며 자랑하겠나?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가면서 오늘도 나의 나 됨으로 준행하며 순복하는 삶이 복인 것을 되새긴다. 공연히 우울하다 또는 몸이 찌뿌듯하여 힘들어하다가도 그것으로 주를 바라며 주를 의지할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한다.
다만,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하는 것을 감수하는 것뿐이다. 온통 공사중이라 은근히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다. 화장실을 갈 때면 연신 물걸레질을 한다. 인부와 마주치면 인사를 건네고 커피를 권하기도 한다. 돌아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산책을 하고 누구와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하며 저들 사정을 듣고, 요 며칠 점점 더 숨 가쁘고 불안정한 몸과 마음을 달래며 하루를 지낸다. 이 모두는 내게 맡기신 생이다. 가난한 소녀에게 금이 간 양동이는 저의 처량한 신세가 아니라 감사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은 미련한 것으로 지혜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한데 오늘 또한 우리의 신앙은 안 믿는 자만 못한 ‘반성경적 이상주의자들’이 늘고 있는 듯하다. 나름은 믿는 자로 산다고 하는데, 때에 따라 술도 한 잔 하고 가끔은 타협도 하면서 ‘사회생활이란 다 그런 것’이라며 스스로를 허용하고 철석같이 믿는다. 교회에 열심이고 나름의 봉사와 헌신에 만족한다. 남을 판단하고 자신의 의를 두둔한다. 그야말로 ‘반성경적 인격장애’ 또는 종교주의자들이 너무 많다.
1980년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조지 루이츠가 1등으로 골인을 하였다. 골인지점을 지키고 있던 관중과 많은 기자들이 저를 취재하고 응원하려 모여들었다. 저는 환호하는 대중 앞에서 당당하였다. 그런데 뒤에 밝혀진 것은 1.6킬로미터를 남겨놓고 교묘하게 레이스에 끼어들어 1등을 한 것이다. 이것이 밝혀지고 대회 주체측도 저의 1등을 취소하였으나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완주한 것으로 믿고 이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사회학자들은 저를 ‘반사회적 이상성격자’라 진단하였다. 종종 우리의 믿음 생활도 이와 같지는 않은가? 성경과는 거리가 먼데 스스로 허용하고 남들이 수용하는 것에, 덩달아 용인하고 묵인하고 그리 여기며 산다. 자신의 기도 생활과 말씀 생활을 매우 존중한다. 교회에서의 역할과 사람들의 판단에 우쭐하고 만족한다. 성경은 이를 경계하는데 저는 과감하게 통달한 사람처럼 스스럼이 없다.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절묘하게 접목시켜 적당히, 그러면서도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취합하여 타협과 화해를 모색한다. 그런 오늘 날의 행태에 ‘우리는 예수로 산다.’고 성경은 단언한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 4:2).”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과연 그러한가?
그러면서 덩달아 ‘영끌’로 ‘똘똘한 아파트 한 채’에 목숨을 건다. 눈 뜨기 무섭게 주식 현황부터 살피고, 자다가도 미국 장을 열어 판도를 계산한다. 그럴 수 있지. 회사 일로 씨름하다 안 믿는 상사 술 한 잔에 적당한 타협까지, 그럴 수 있지. 조지 루이츠처럼 42.195킬로미터 되는 마라톤을 1.6킬로미터만 뛰고 1등으로 골인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그럴 수 있지! 어쩌면 우리는 그럴 수 있다는 ‘반성경적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경과 상관없이 세상 사람들이 모시는 ‘알지 못하는 신’과의 화목으로 족한 것이다. 굳이 알 거 없고, 알고 싶지 않고, 애써 성경적으로 살아야 하는 무게에서 놓여나 십자가 없는 구원으로도 족한 이 땅에서의 ‘팬터하우스’를 꿈꾸며 산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살자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먼저는 구원 받은 것으로 족한 게 아니라, 구원 받은 자라면 그 구원을 이뤄가야 하고,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이건 내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고 추구했던 이상과 종교가 아니다. 부대끼고 불편함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깨어 기도해야 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그렇게 자신을 깨고 사는 데서, 마치 금이 간 양동이의 물로 꽃들이 만개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그러할 때 자신의 죄의 본성을 깨닫고 어리석음을 멈추려는 의지가 생겨난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억지로 뭘 하는 의지가 아니라, 말씀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의지로서의 믿음이다. 이는 곧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일이다.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시 111:2).” 이를 앎으로 오늘 시편도 굳은 마음을 더한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56:4).” 다른 거 없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람을 어찌 의지하려 해봐야 헛일이다. 자신을 봐도 이는 확연히 알 수 있다. 내 안에 온갖 죄가 가득하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당해낼 수가 없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또 어찌할꼬?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 31:23-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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