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고전 7:24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7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란, 부르심 그대로 지내는 것이다. 맡은 바 그 자리에서,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 7:20).” 곧 우리는 거저 된 사람이 아니라 각각 그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23).” 하심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과의 비교가 어림도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를 속량하는 값은 너무 커서 우리가 그 값을 준비하려면 영원히 애써 수고한다 하여도 어찌 다 마련할 수가 없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8).” 이를 우리는 감사히 받고 정중히 주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상책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11).”
자주 목격하고 드는 생각은 주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믿는 가정에서 믿는 사람들과 함께 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런저런 사연을 접하다 보면 말할 수 없는 고통 뒤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면모가 숨겨져 있었다. 애나 어른이나 사는 게 다들 녹록하지가 않다.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 가운데 자폐성 학습부진과 의욕 상실의 아이들이 많다. 그 가운데 ‘똥싸개’가 있는데 녀석은 작년 이맘때 와서 처음부터 그렇게 똥을 지렸다.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풀려서인지 우리 집에만 오면 그렇게 똥을 싸대곤 하였는데, 들어서다 바지에 지리거나 변기에 앉기도 전에 싸대기도 하였다. 한동안 그러다 이제는 제법 의젓하여졌다 싶었는데, 요즘은 또 그렇게 오줌을 싸댄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으로 덩치도 제법 자라서 큼지막한 녀석이 한동안 또 복도에 오줌을 싸고 들어오더니, 요즘은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 오줌을 쌌던 모양이다. 어제는 기어이 관리실에서 전화가 와서 알았다.
이렇듯 소소한 사건들이 끊이질 않는다. 이를 들춰보면 편부모 가정에서 자랐거나 조부모 손에 자란 경우가 많다. 열에 아홉은 안 믿는 가정이다. 또한 결손 가정의 결함을 안고 있어 대부분 아이들이 그와 같은 모순을 생으로 안고 지낸다. 어제의 경우는 아주 작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아이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책장을 찢고 쌍욕을 하고 덤비는 경우도 있다. 그러고 나면 아이들 사이에서 자기 스스로도 무안해져서 더 격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둘로 나뉘어서 저를 피하거나 없는 말을 지어내어 아주 몹쓸 상대로 만들어놓기도 한다. 한 번은 학교 내에 ‘자해소동’이 크게 문제가 되었는데, 자신의 팔을 긋거나 목을 조르거나 죽을 정도로 숨을 참는 경우들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 아이 중에 하나가 먼저 그와 같은 행동을 했던 모양인데, 이는 아이들끼리 서로 지목해서 아는 것이라 사실 확인은 할 수 없다. 다만 그 아이는 가정부(?) 손에서 자라는데 아빠는 누군지 모르고 엄마는 어디 지방에서 일을 하다 한 달에 한두 번만 집에 온다고 하였다.
요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느 특정한 누구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이를 환경의 문제나 그 부모의 문제로 돌릴 수 없다. 원인을 그렇게 찾으면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안 그런 아이들도 더 많다. 문제는 죄다. 공통된 원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예전에 잠깐(!) 믿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름은 멀쩡한 가정인 것 같은데, 공무원인 아빠는 술 먹고 들어오면 그렇게 욕지기를 해대며 자는 애를 깨워 들들 볶듯 잔소리를 하고, 아이 보는 앞에서 아내의 뺨을 갈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말을 아내에게 꺼내놓고 수다를 떨듯 털어내는 아이는 그나마 밝고 개운하다. 늘 음울하고 피곤한 아이가 있는데 얘는 오기만 하면 엎드려 잔다. 그래서 늘 그 애는 먹을 것을 주거나 라면을 끓여준다고 하면 좀 낫고, 것도 늘 의욕이 없다. 알고 보니 엄마가 늘 아프다. 잔병치레에 장사 없다고 자기 몸이 고달파서 그런가, 그렇게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고 잔심부름을 시키는 모양이다. 얘는 아주 눈 뜨고 있는 시간이 괴롭기만 하다. 그러니 어제도 ‘오줌싸개’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있고는 아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그런 애’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다, 하고 우리는 가정예배 드리기 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저들, 안 믿는 영혼의 피폐한 삶을 두고 기도하였다.
오늘 말씀은 그런 경우의 수를 두고 바울의 권고의 말씀이다. 결혼을 하는 것도 혼자 사는 것도 모두가 주를 위해서 하라는 소리다. 좋아서 결혼을 하니 하나님보다 남편을 위해야 하고, 아내를 위해야 하고, 그러다 자식이 생기면 그 자식이 또 상전이라. 그러니 사는 게 늘 하나님보다 위하고 먼저여야 하는 게 다반사다. 그러자니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려야 하고, 먹여 살려야 하는 입들로 힘에 겨워 사는 게 지옥이라. 그 가운데서 어찌 찬송이 나오고 주께 영광을 올리는 삶이 지속될 수가 있겠나? 그저 다들 사는 게 지옥이다. 애들은 애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요즘 공사하는 교회 건물에 있으면서 막노동을 하는 사람이나 기술자로 일하는 사람이나 저를 부리는 사람이나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나 사는 게 고역이라. 틈만 나면 담배를 한 대 물고 창가 쪽에 서서 길게 한숨을 내뿜는 게 낙이다. 몇 해째 그곳에 있다 보니, 어제는 마무리 작업을 하는 주인 사장의 사촌 동생뻘 되는 이를 만났다. 지난번에는 무슨 일로 잠시 일이 중단되어 교회에서 형을 기다리며 같이 커피 한 잔을 한 적이 있어서 대충 저에 대한 기억이 있다. 의정부 어디에 사는데, 말을 좀 더듬어서 어눌한 말투인데 그래도 십장이라 제법 입성은 좋았다. 그때, 목사님 저도 어릴 때는 교회 열심히 다녔습니다. 우리 이모부도 목회를 하고 친구 누구도 뒤늦게 목사가 되었다는 둥 그런 소릴 들었다. 담배를 물고 있다 나와 마주치자 얼른 바닥에 밟아 끄고는 반가운 듯 주먹인사를 건네며 잘 지내셨냐? 아는 체를 하였다.
그저 다들 여전하다. 그러니 오늘 말씀이 얼마나 귀한가?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물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란 주신 데서 주를 바라며 주와 함께 주를 위하여 사는 일이겠으나 더는 ‘사람들의 종’으로 사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18).”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제 주를 필요로 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사는 게 재앙이다. 죄로 인한 결과다. 이와 같은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구하며 살아야 할까? 결국은 자꾸 남들처럼, 사람들의 종이 되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바라고 의지하며 산다. 그런 우리는 결국 죄의 본성으로 죄를 더할 뿐이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바울도 절규하였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너는 별난가? 하고 누가 물으면 나 역시 똑같다. 내 몸 하나 건사하고 사는 일에도 힘이 부친다. 그러니 돌아보는 것은 곁의 사람들로 저들이 사는 데 따른 모양을 동경한다. 이에 사람의 종이 되려 하는 게 아니라, 그리 따라하고 있기 마련이다. 같은 것을 바라고 같은 것을 부러워하면서… 한데 우리가 저들과 전혀 다른 점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성령이 이제 날 위해 탄식하심으로 기도하신다. 우리는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은혜로만 산다. 저들과 우리의 다른 점이다. 저들이 보기에는 우리의 모습이 무익한 것 같으나 안 믿는 사람들로는 멀쩡한 가정이 없고 힘겨워하는 아이의 마음을 조금만 들춰봐도 저들의 실상은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다. 쟤를 어쩌면 좋지? 하고 묻는 아내에게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나? 나름 미술심리치료도 받고 상담도 받고 있다고 하고, 그나마 자폐는 아니라니 점점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모양인데….
우리에게 저 아이들을 보내시는 까닭은 우선은 대신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저 주의 마음으로 위하고 대해주는 것이다. 여느 학원에서 더는 안 되겠다, 하여 애들이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 어쩌다 우리 공부방이 되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나? 지금도 이 새벽에 창밖으로는 술에 취한 아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아침이 오는 것을 괴로워하는 듯 울다 웃다 노래하다 욕지거리를 해댄다. 곧 누가 민원을 넣어 경비실 누가 달려가겠지만, 그러니 저 애들을 어쩌면 좋을까? 그 부모의 제멋대로인 영혼은 어쩌면 좋을까? 우리를 돕는 보혜사 성령이 계시다는 것, 내 안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저들을 안타까워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오늘 바울 사도의 직언도,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이 값어치를 바로 알 때에야 우리 삶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가를 알게 된다. 하면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40).”
우리 안에 주의 영을 받고 산다는 주의 영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지. 살면 살수록 우리 안에 더하신 이 믿음의 값진 의미가 새롭다. 이를 통하여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 57:2).” 나는 이제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산다. 길게 내뿜는 담배 한 대로 위로를 삼고, 몇 푼 더 받는 돈의 값어치로 사는 따위의 생이 아니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7).”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두신, 그대로의 나는 묵묵히 주를 바람으로,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0) | 2021.05.21 |
---|---|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 (0) | 2021.05.20 |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0) | 2021.05.18 |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0) | 2021.05.17 |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0) | 2021.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