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전봉석 2021. 5. 23. 06:03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전 11:27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시편 61:7-8

 

 

먹고 사는 일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 우리는 주의 몸을 먹고 마신다. 성찬식 때 주로 나누는 말씀으로 실제의 삶에서도 저는 말씀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우리로 먹고 사는 문제는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누구에게 이는 은혜이고 누구에게 이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누구는 감사하고 누구는 화가 난다. 누구는 마다하고 누구는 감지덕지 송구할 따름이다.

 

보면 늘 우리 삶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다. 돈이며 건강이며 사람관계며 뜻하는 바, 모든 일이 실은 통제 안에 있기보다 통제 밖에 있다. 그럴 때 누구의 말처럼 우리의 부족함은 되레 우리로 옳은 길을 가게 한다. 어려움과 고통이 예수께 마음을 묶어두게 한다. 실제 나는 나의 어려움으로 주를 더욱 필요로 한다. 가령 모든 일은 여러 개의 상황이 겹쳐 각각의 이야기를 구성하곤 한다. 복음을 전하시고 갈릴리 맞은 편 가이사라에 가실 때, 귀신 들린 자를 만나시고 저에게서 군대 귀신을 내쫓으셨다(눅 8:30). 이러한 기적 앞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를 기다린다.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40).” 그때 회당장 야이로가 찾아와 열두 살 외딸의 죽어감을 호소하고 살려달라 하고 예수께서 저의 집으로 가실 때 많은 인파 속에서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나음을 입는다(44). 마치 각각의 이야기인 것 같으나 하나를 조명하고, 한 날의 일인 듯하나 저마다의 이야기이다. 저들은 모두 통제 밖의 일로 예수를 만났다. 귀신들려 미쳐 날뛰는 사람이나 죽어가는 딸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회당장이나 열두 해 동안 남모르게 고통을 견뎌왔던 혈루증 앓던 여인이나… 우리는 서로 아무렇지 않은 듯 무리지어 사는 것 같지만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각양각색의 문제들로 씨름하며 산다.

 

통제 밖의 일은 우리로 도움을 필요로 하게 한다. 더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고 사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일일수록 사람 외부의 기적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보면 늘 광기어린 날이 우리를 지배하고, 속수무책으로 병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를 억압하며, 남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우리를 지치게 한다. 이로써 주를 바라게 되는 은혜가 있고 그와 같은 은혜를 헛되이 차버리고 되레 모욕적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런 거 보면 우리의 믿음은 절박함과 비례하고, 부족함으로 주를 찾으며, 난감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예수님은 오직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다. 십자가로다. 이를 우리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모두는 예수를 필요로 하나 자신들의 필요로 원한다. 저마다의 꿍꿍이가 있다. 갈급함이 주를 바라게 하나 실은 우리의 갈급함은 저급할 따름이다. 이때에도 다만 먹고 사는 문제로 시름한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물으시는 것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눅 9:20).” 이를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의 삶으로 사는 일은 다르다. 너무 큰 차이가 있다. 실은 이 말을 저는 그때에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면서도 그리 고백하였다. 그때도 바라는 바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그 증거는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두는 뿔뿔이 흩어졌다. 떠나가 자신들 살 궁리를 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3).” 결국 우리의 믿음이란 얼마나 허약하고 별 볼 일 없는 것인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알면서도 저는 자신이 아는 바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모순과 같다. 저마다 나름대로 들 잘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실제 그와 같이 남모르는 일을 감추고 사느라 정신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떼고 산다. 안 그런 척 엉뚱한 것으로 과신하고 신봉한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앎을 통제하셨다.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눅 9:21).” 하나님 없는 승리도 주권도 통치도 모두 무의미하다. 가끔 성경을 보면 자기 고향에서 더 자신을 숨기셨고, 자기 민족들 앞에서보다 이방 사람들에게 자신을 훨씬 더 개방하시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저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곧 우리가 아는 앎이 우리로 눈을 멀게 할 수 있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은혜보다 끔찍한 게 있을까? 감사하지 못하는 경우의 수는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없는 까닭이 아니라 너무 잘 안다고 여기는 편견 때문이다. 저들이 바라는 메시아는 그런 게 아니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니!

 

메시아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의미이고 이는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으로였다. 저들의 메시아는 왕으로 선지자로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제사장으로서 자신이 산 제물이 되려고 십자가를 지시는 데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도 항변이 일어난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마치 저는 누구보다 그리스도 예수를 잘 안다고 여겼다. ‘결코 주께 그런 일은 미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자신이 확신한다. 자신이 확신하고 자신이 강하게 붙드는 것이 믿음이 아닌 것은 신념과 믿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념은 스스로의 것이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믿음은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산물이다. 은혜로 주신 것이지 내가 이루어 얻는 굳건한 결심이 아니다.

 

요즘은 자주 주인 사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아무래도 공사 때문이기도 하겠다. 오다가다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연다. 어제도 한참을 서서 일하는 인부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면서 드는 아찔함은 저의 확신이었다. 이러저러한 상황을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 여러 경험이 자신 있게 만들었다. 하긴 어쩌다 신용불량자로 시작하여 군고구마 장사로 일구기 시작한 첫 사회생활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자신은 스스로도 뿌듯하게 여길 만큼 잘 이겨내고 살아왔다. 나는 그때마다 저의 뒤에서 기도하였을 모친의 기도를 생각하였고 저는 자신의 의지가 남다름을 신뢰하였다. 은연중에 자기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눈멀게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였다. 자신은 통제 가능한 범위에서 은행 대출도 서로의 인맥도 잘 다스려왔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들을 때마다 뭐라 토를 달지 않는 것은 그래도 저는 알 수 없는 지점에 있다. 마흔 중반으로 나름 일가를 이뤄 한두 채의 집과 상가를 소유하고, 이번에 어디와 맺은 협약으로 앞으로 10년을 내다보며 꿈꾸고 있는 일들이 있었으니. 그러다 내가 슬쩍 어머니의 기도를 운운하면 저는 풋, 하고 웃으며 흘겨 듣고 만다.

 

그래서였을까? 통제할 수 없는 세 이야기가 한데 엮인 가이사라 땅에서의 이야기가 어제는 묵상이 되었다. 광기어린 삶과 숨기고 감추며 부끄러워 남모르게 고통당하며 사는 삶과 더는 어쩔 수 없는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의 슬픔에 대하여… 그런 일들이 우리로 주께 나아오게 하고,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이었으나. 또한 온전히 주를 바라기까지는 여전히 묘연할 따름이어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고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도 우리가 통제하기를 바란다. 내가 바라는 메시아가 따로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구원자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한 술 더 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십자가의 구원이 우리로도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

 

오늘 바울이 전하여주는 말씀에서도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7).” 그렇다면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로도 누군가의 떡과 잔이 되어야 한다. 살과 피를 나누어야 한다. 대체 왜 이런 무모한 일을 자처하라 하시는 것일까? 이를 시편의 말씀에서 답을 얻는다.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시 61:7-8).” 곧 우리의 삶은 영생을 예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동시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계셨다. 이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의 죽음으로 모두의 대속제물이 되어주시는 일이었다. 이를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함께 하는 베드로도 제자들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18).” 성령으로가 아니면 그저 귀신이 떠나가고, 괴롭게 하던 부끄러운 질병으로부터 놓여나고, 죽을 병에서 나음을 입은 것으로 그칠 뿐이다. 그런들! 저들은 모두 죽는다. 광기어린 삶에서 놓여나 멀쩡한 삶을 살았다 한들,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남모르게 고통당하지 않으며 살았다 한들, 죽었던 아이가 살아나서 기쁨으로 살았다 한들… 우리의 모든 결국은 죽음으로다. 이렇듯 일 억 이상을 들여 새로 공사를 하고 또 다른 일을 벌여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얻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한들. 저이가 마흔 중반이니까 후하게 쳐 이제 반 살았다 하고 마흔을 더 넘겨 살았다 한들. 오늘 말씀은 그런 우리에게 자신을 살펴, 더는 죄를 먹고 마시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8-29).” 주를 바라고 말씀을 의지하는 게 자신들의 바람이나 기대를 가지고 요구하는 바,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로는 어림도 없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 고백하고도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하고 결의하는 자신의 앎도 통제가 안 된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시 61:1).” 나는 나의 약함으로 주를 구한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2).” 이것으로 주를 바람이 내게 유익이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3).” 그와 같이 바울도 자신의 약함을 사랑하였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행여 귀신이 떠난 저는 주를 바라며 일생을 살았을까? 혈루증이 낫고 저는 온전히 주만 바라며 나아갔을까? 죽었던 딸아이가 살아나고 저는 여전히 간절함으로 주와 동행하였을까? 오늘의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으로 전부가 아닌 것을,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시 61:4).” 그리하여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