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62:5-6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 62:7).” 이와 같은 고백이 온전히 나의 것이어서 주께 드려지기를. 하면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8).” 아무도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담아두고 사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누가 서로의 속을 알겠나?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그러면서도 괜찮은 척 하고 사는 게 인생이려니. 아이도 그런 것을. 지능이 낮고 말이 어눌하나 그 속에 왜 이런저런 어려움이 없으려고.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한낱 그 정도인 인생을 두고 서로들 참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종종 황당하기만 하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왕으로 선지자로 우리 앞에 오신 줄 알았던 메시아가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며 것도 하신다는 말씀이, 우리더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하시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때로 어처구니없고, 때로 이상한 일이기만 하다. 곧 자아를 죽이라는 소린데, 자기 자아를 죽인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내가 좋은 거, 내가 그처럼 추구하고 바라는 거,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단념하라니. 그와 같은 예수님의 죽음을 두고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셨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눅 9:30-31).” 이를 알지 못하고 베드로는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면서 별소릴 다한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33).” 그러니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어째서일까?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32).” 졸다가 깼다. 그 와중에 잠이 들었던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신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 14:38).” 영혼을 깨우지 못하면 오늘 우리가 바라는 게 뭔지, 말하는 게 뭔지 알지도 못하고 애쓴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은 심각하게 예루살렘에서 있을 십자가의 죽음을 서로 말하는데, 그저 황홀함에 젖어 비몽사몽간에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지껄이는 것이어서.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막 9:6).”
그런 게 뭔지 알겠다. 불안은 생각 위에 생각을 얹고 말 위에 말을 보태어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고 앞서서 염려하게 한다. 이를 아시고 주님은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무엇이 중한지, 우리가 알 길은 자기 자아를 죽여야 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릴 위해 기도하신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우리를 위해 비는 이 기도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
내가 아버지의 것임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다는 것인데, 이는 나의 자아를 죽임으로 주 앞에서 사는 일이다. 행여 스스로의 영적 만족감에 젖으면 베드로와 같이 자신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면서 바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작 예수께서 ‘그러자.’ 하고 그 산에 머무셨다면… 세상을 등지고 그대로 승천하셨더라면, 오늘 우리의 이 구원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 자고로 ‘입을 열어 의혹을 없애기보다 침묵함으로 바보로 여겨지는 것이 현명하다.’는 말이 있다. 다만 이 한 날의 삶이 복된 것은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 118:24).” 한 날의 수고로 족함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그렇게 우리는 살아서 주를 바란다.
아이는 불안이 더하면 엉뚱한 말을 더한다. 사방을 둘러보며 괜한 말을 건네기도 한다. 가만 보니 새로 안경을 샀는데 뭐라 할까봐 그런가, 눈치가 여간 아니다. ‘멋지다.’ 하는 말 한 마디에 안정을 찾고 가만히 앉아 성경을 썼다. 공사중이라 예배시간은 어수선했고 담배냄새에 분진가루를 막느라 켜 둔 선풍기소리에 말은 흩어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말씀을 전하면서도 문득 드는 생각이, 모두들 참 애쓴다싶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눅 9:35).” 직접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씀이고, 다윗의 혈통으로 왕이 되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면서 이스라엘 전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1:35).” 그 예수님은 세상에 계속 머물려하지 않으셨다. 그러면서도 변화산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도로 현실이다.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 구절을 찾아가며 그 의미를 되새기며 황홀해하는 것은 순간이다. 곧 지나 가슴은 답답해지고, 안정제를 삼키며 다시 현실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처음 마주하는 것이 스스로도 통제가 안 되는 귀신 들린 자였다.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9:37-39).” 현실은 냉정하고 잔혹하기만 하다. 그러니 다들 사는 게 지옥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새기며 산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땅한 줄 알고 쫓기듯 산다. 사느라 사는 데 정신이 없는 것이다. 한가하게 주를 바라며 황홀하게 주의 변화된 모습을 감당할 여력이 없게 하신다. 그런 우리를 호되게 나무라시는 주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41).”
오늘을 사느라, 정작 오늘의 의미를 잊고 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은혜를 입은 자의 특권은 은사를 바람이다. 주를 바라며 위하고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은사이고 누구를 가르쳐 주를 전하는 삶도 은사이다. 또한 잠잠히 주를 바라며 주께로 소망을 두고 사는 일도 은사다. 이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5-6).”
‘더 큰 은사’란 무엇을 말함일까?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바울이 특별히 원했던 것은 말씀이었다. 성경은 예언서다. 앞으로의 일을 기록하셨다. 이를 바르게 알고 가르치고 묵상하며 준비할 수 있는 것이 복이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세상은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며 더 나은 쪽을 택해 나아가지만 우리는 오직 주만 바람이며, 잠잠히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이것으로의 예언이다. 무엇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서로 안면이 있는 인부는 그래도 설교시간에 맞춰 공사를 멈추고 일찍 점심을 먹으러 갔는가, 순간 조용해져 가만히 기대감도 생겼다. 실은 자신들도 어려서는 교회를 다녔었다는 소리와 친척 누가 목회를 하고 어쩌고 하는 소릴 했었던 터라 혹시 몰라, 나는 저들 자리를 만들어두었고 이는 아무도 모른다. 한 영혼이 주 앞에 나아오는 일은 천하가 뒤집히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소음이 멎고, 순간 내 안에 드는 기대감으로 잠깐이나마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아직 거리가 먼데 먼저 나가 맞이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혹시나 하고 빈자리에 성경과 설교원고를 두었던 것을 누가 알겠나.
우리는 번번이 주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 의미도 깨닫지 못해 엉뚱하게 바라기도 한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눅 9:44).” 이를 알아들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세베대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예수께 데려와 인사청탁을 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 그러니 우리 주님도 참 속 터질 만하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22).”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우리의 믿음이란, 혹시나 하는 기대와 설마 하는 막연한 설렘을 걷어내면 빤한 욕망만 남는다. 그러니 안 믿는 자나 믿는 자나, 다른 신을 섬기는 이나 주를 바라는 이나 그 속셈은 빤한 것이어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데려다 우리 앞에 세우셨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7-48).”
이와 같은 마음으로 오늘 우리에게 두신 은사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을까?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오늘 내게 두시는 이 한 날의 수고가 거룩이었다. 그렇게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8-10).” 그게 무엇이든지.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11).” 그러므로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3, 27).”
오늘 내게 두시는 이 한 날의 사역으로 귀한 것이다. 이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이는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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