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편 60:12
‘미장원집 아이’가 있다. 어느새 중2가 되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못 쉬겠다고 호소하여 내과 외과를 거쳐 신경정신과로 갔다. 아내가 들려주는 아이에 대해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당신이랑 같은 증세지? 하고 묻는데, 달리… 내가 아는 그 아이는, 그럴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놓여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곤란함을 겪는다. 질병도 낙심도 두려움도 그 원인은 같은 데 있다. 이런저런 아이의 사정을 들으며 공연히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어제에 이어 ‘희년’에 대해 묵상을 이어갔다. 7년이 되면 빚을 탕감해주고 7년에 7년을 곱한 그 다음 해 50년째에는 희년이다. 자유를 선언해야 한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레 25:10-11).”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 누구도 희년을 수행한 사람은 없었다. 가진 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니, 자신의 것을 내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공포할 수 있는 희년은 인생에 있어 단 한 번 돌아올 거였다. 그러나 희년을 알리는 나팔소리는 없었다. 하나님의 법은 무시되었다. 많은 선지자들이 이를 비통히 여겼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외면당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언급하는 희년을 회당에서 다루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곧 한 번도 지켜지지 않은 희년을 공포하시며 자신이 그 값의 제물이 되시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었다. 하나님이 모든 빚을 면제해주실 것이다. 권세 잡은 자에게서 놓여나게 하실 것이다. 조상 아담이 잃어버린 유산을 회복하실 것이다. 주께서 그 값을 물어주심으로 우리에게 돌려주실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21).”
말씀이 응하였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 은혜에 놀라며 저의 출신을 살피는 사람들의 모순을 보게 된다. 모두는 놀랍게 여겼고, 그런 저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23).” 저들은 그저 기적을 바랐고 이를 행하라고 요구하였다. 무엇이 사람들을 화나게 한 것일까?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29).”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할 때 은혜는 의무로 다가온다. 권리처럼 행사하게 된다. 권리처럼 행사한다는 것은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의무가 하나님한테는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는 의무로 여겨져 예배시간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다. 뭐 그리 해야 할 게 많은지, 기도도 해야 하고 성경도 봐야 하고 구제도 해야 하고 헌신도 해야 하는… 저에게 은혜는 교회에서 내미는 청구서 같다. 누구는 한 번도 ‘인자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고 나름 주의 일을 감당하며 산다고 살았는데, 늘 주의 일은 의무처럼 다가왔다. 요구조건이 까다로운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이다. 주가 자라신 곳이다.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모두가 예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은 예수께 다만 기적을 요구하였다. 어느 젊은 목사는 열심을 다해 주를 섬겼다. 일찍이 주의 부르심에 응하였고 충성되이 헌신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무참히 데려가신 것이다. 저는 이내 사역을 내려놓고 교회를 떠났다. 저의 부친도 목사였고, 저는 늘 교회에서 자랐다. 저에게 하나님은 가혹하였다. 속초 어디 작은 암자를 지어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내가 신대원을 하려 할 때 선생은 최종적으로 나를 설득하여 그 친구를 소개하고 내게 전화하게 하였다. 저는 내게 전화를 하였고 한 번 다녀가라고 일렀다. 나에 대해서 들은 바로는 내가 자신과 많이 닮았다고 하였다. 그때 문득 저이를 찾아가 만났으면 어땠을까? 어제는 문득 그때 일이 생각났고 저에게 복음이란 마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게처럼 화나게 하는 것이었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오늘 아침 바울이 전하여주는 말씀은 자주 듣고 묵상하는 것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리고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또한 누구의 은둔생활을 생각하였다. 저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은 더욱 화딱지 나게 만드는 소리로밖에 더 들리겠나?
은혜는 두려운 것이다. 잘 벼린 양날의 검 같이 조심스럽다.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한데 회당에서 전하시는 말씀에 화가 나서 죽이려 들었다. 은혜로운 말에 어째서 적개심을 드러내게 되는 것일까? 자신들에게도 보일 것을 요구한다. 잘 안다고 여기는 데서 오해가 더 깊었다. 저들의 앎이 저들을 찔렀다. 마땅히 들어줄 줄 알았다. 고향 사람이고, 일찍이 헌신하고 충성하였는데, 나름 한다고 수고하며 주를 위해 살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에 응해야 할 의무가 없으시다. 우리는 수시로 은혜를 바란다. 좋은 것으로만 여긴다. 더 많은 것을 축적하고 누리고 자기 것으로 가지기를 바란다. 내어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구도 희년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그 값을 대신 감당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다. 자신들이 행하지 못한, 돌려받지 못한 유산을 두고 저들은 그것까지도 요구하는 것으로 기도라 생각한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은 마땅히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
왜 저 아이는 화가 났을까? 나는 ‘마장원집 아이’를 생각하였다. 초등학교 4, 5학년 때 글방으로 오던 아이가 어느새 중2가 되었다. 병원을 전전긍긍한다는 소리에 남 일 같지가 않았다.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자신들에게 기적을 보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던 사람들처럼… 우리 안에 공연한 억울함이 있다. 서로에게 돌려받지 못한 것을 하나님 앞에 청구하며 마땅히 여긴다. 들어주지 않자 저를 죽이려고 한다. 아이는 늘 누구처럼 잘하고 싶어 했다. 매번 같이 다니는 아이가 바뀌었고, 그때마다 저 아이의 주머니는 열린 바구니였다. 같이 다니는 아이마다 당연하다는 듯 무얼 사 달라고 요구하였고 아이는 그때마다 대신 값을 지불하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돈이 떨어지거나 자신도 받기를 바랄 때면 영락없이 같이 놀던 아이들은 떠나갔다.
기적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화를 들려주셨다.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눅 4:26).” 시돈 땅은 우상숭배의 온상지였다. 악명 높은 이세벨의 고국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과부로 산다는 것은 어떠할지 상상이 된다. 은혜는 하나님의 전유물이다. 어떤 제약도 의무도 있을 수 없다. 그런 땅에 저런 이에게 엘리야를 보내셨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27).” 저는 문둥병에 걸린 이방 땅의 장군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원하시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때에 얼마든지 행사하실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이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시는 오늘 말씀을 다시 되뇐다. 왜 자꾸 싸해? 아내는 자꾸 물었고 나는 누워서 TV를 보다, 대꾸도 않고 TV를 끄고 일찍 잤다. 내가 왜 자꾸 싸한 것일까? 우리끼리 그냥, 싸하다는 표현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불안? 공포? 그런 게 얼굴에 드러나는지 아내는 눈치를 채고 그때마다 싸해? 묻곤 하는 것이다. 왜 나사렛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화가 났을까? 왜 선생의 절친한 저이는 목회를 접고 교회를 떠나 암자로 들어가 버린 것일까? 어쩌자고 이제 중2 아이는 숨을 못 쉬겠다고 호소하며 벌써부터 정신과를 전전긍긍하게 된 것일까? 왜 나는 생각 없이 TV를 보면서 자꾸 싸해지는 것일까?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밖에는 하나님은 미쁘심으로 더하지 않으신다. 설령 감당하지 못할 때는 피할 길도 열어주신다.
이런저런 사연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성경은 오늘도 나의 어깨를 툭툭 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시 60:12).” 하면서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115:3).” 은혜는 그처럼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시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 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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