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 9:23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편 59:16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살아서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겠다. 하면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하루 동안에 이와 같은 것을 경험하고 묵상하며 사는 일이 복이다. 하여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16).” 그렇게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9).” 하는 말씀을 여러 번 되뇌며 묵상한다.
‘이 글이 오늘 네 귀에 응하리라.’ 하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 4:21).” 귀에 응한다는 것이 듣고 깨달아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하고 주님은 그 이유를 분명히 하셨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행 2:26).” 이와 같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심도, 이와 같은 글을 쓰며 주의 말씀을 더듬어 알고자 하게 하심도 주께서 나를 상대하심이 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이를 앞서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다.
이를 오늘 바울은 자신도 어찌 행하고자 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앞서 다윗의 응축된 고백으로 정의하면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시 59:10).” 하나님이 나를 영접하심은 물론 나의 원수, 가난하고 포로 되고 눈 멀고 눌린 자로 살아가던 나를 그것들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알 때 자신들을 마치 달리기 선수처럼 비유하면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참고 견디는 까닭은 상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큰 은혜에 대한 오해는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들 받는 것을 나도 받은 정도로 알 때 구원의 감격은 감소한다.
하지만 바울의 인식은 다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 그러니까 다들 ‘인생을 즐겨라.’ 하고 외쳐대는 세상에서 왜 이처럼 이기기를 힘쓰는지, 마치 운동선수의 인내와 소망을 견주어서 들려준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6-27).” 그러니 그게 말처럼 쉬운가? 스스로 자신을 쳐 복종하게 하기까지 싸우기를 애쓰는 것이다.
나는 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는 나의 실제 모습을 바로 인정한다. 내가 어찌 살아왔는지, 내가 아는 나는 구역질나고 차마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즐기며 살아왔다. 그런 나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늘에 두시는 이 은혜는 결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은혜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물며 주의 종으로 세워 어쨌든 말씀 전하는 자로 삼으셨으니, 죽어 마땅할 뿐 아니라 저주를 받아 버림당하는 게 당연한 자를 이처럼 귀히 쓰시는 일이니 나의 은혜는 감격스러워 몸 둘 바 모르겠다. 또한 나의 달음박질은 그러므로 묵묵히 무던하게 내게 두신 자리를 지키며 할 수 있는 바를 수행하는 것이다.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누구의 일에 같이 마음을 쓰며 덩달아 고민하다 숨을 몰아쉬기도 하고, 약한 몸을 이끌어 그럼에도 달려갈 길을 다하는 것이겠다. 그래봐야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것이나…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나는 이제 이 구원의 가치를 안다! 곧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무엇이 더 중한지, 어떤 것을 배설물처럼 여겨야 하는지를 바로 알기 위해서도 말씀을 당긴다. 말씀 앞에 앉는다. 죄의 종이 별 건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주님은 늘 말씀을 현실의 문제로 다루셨다. 뜬구름 잡는 이상이나 가치가 아니다. 어제도 아내와 잠시 설왕설래하다 늘 그 ‘동대문 집’이 문제다. 재개발이 들어가고 그럼 더 오를지 내릴지, 수지타산을 계산하는 저들에게 얼른 거기서 돌아서기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쨌든 귀신 밥 먹고 자란 곳 아니겠나? 여전히 그 건물에는 철학원이 들어가 있다. 거두절미하고 세금이 얼마가 붙든, 앞으로 얼마나 더 이익이 생길지 손익계산을 멈추고, 얼른 팔아치울 것을. 줄 사람에게 주고, 이제 그만 놓여나기를… 그러니 아무리 말해도 쉽지 않은 것은 이래저래 엉긴 게 많다. 말이 많지만 결국은 다 돈이다. 천하를 얻은 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겠나.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신 말씀에서도 오늘의 나의 은혜는 참으로 과분할 따름이다. 어제는 뜬금없이 아빤 날 위해 어떻게 기도를 하고 있어? 하고 딸애가 물었다. 뭔 소린가 했더니 계속 자기 좋다는 자리가 목회자인 모양이다. 사모는 싫다고 그리 고개를 가로젓는데도, 그러니 나더러 퉁명스럽게 하는 소리이겠다. 이 보다 복된 삶은 없다! 나의 말은 간단하였다. 가장 친한 친구가 시집을 갔는데 너무 잘 갔다!? 안 믿는 가정이라 그게 좀 걸리지만… 이 시국에 시댁에서 ‘똘똘한 아파트’ 한 채를 해주고, 신학교 조교로 일하던 아이를 몇 푼 번다고 하면서 턱하니 일억을 주며 주식이나 공부하면서 연습하라고 내주지를 않나… 그러니 얼마 전 집들이를 갔다 오고 은근히 들 부러운가 보다. 그 애 부모가 목회를 하는데, 그 사실을 알 리 없고. 그 애마저 이런저런 이유로 안 믿는 신랑 따라 주일이면 그렇게 시댁이며 무슨 행사며 어떤 놀이에 정신이 팔렸다는데… 그게 부럽냐? 하고 물으면 은근 그런 모양이었다.
부럽지. 당장 그러고 사는 게 왜 안 부럽겠나? 근데 참 그 애도 어지간한 것이 그 위 언니 애가 그렇게 곁길로 갔다가 암에 걸려 도로 붙들려 왔다면서 항암하고 아직 초기 암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인지……. 어제는 이래저래 마음이 어려운 하루였다. 처가 쪽 일은 처가 일대로, 딸애 얘기는 딸애 얘기대로.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아둔한가. 당장 좋고, 지금이 좋으면 행복한 거라. 그렇게 세상이 우리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믿는 자의 마음들도 이렇게 쥐고 흔드는데 하물며 안 믿는 자들의 지론이야 타당하고 훨씬 합리적인 것 같은 거야 당연하겠지.
결국 주님은 성령으로밖에는 이를 받을 수 없음을,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눅 14:18).” 저들이 다 싫어하고 거절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동대문 집’이 그래도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것인데 어찌 그리 쉽게 놓을 수 있겠나? 보면 다들 어수룩하고 별 볼 일 없는 이가 목회를 한다고 사역자의 길을 가고 있으니 눈에 들어오겠나? 이를 어찌 말로다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그러니 나는 어떠했던가? 하고 내 삶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가관이라. 주의 은혜가 아니면 해결이 안 되고, 성령의 강권하심이 아니면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세상이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22).” 사람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받을 수 없는 이치다.
가령 구약에 보면 희년 제도가 있다. 7년이 되면 빚을 모두 탕감해주고, 종을 놓아주어야 한다. 7년에 7년을 곱해 50년 되는 해에는 그 모든 것을 본래대로 돌려주어야 한다.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신 15:1).” 이는 ‘여호와를 위한 면제다.’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2).”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희년이 단 한 번이라도 지켜진 적이 있다는 기록이 없다. 누구도 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만큼 가진 것을 놓아버리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10).”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보아도 내 코가 석 자이고, 내 입이 먼저인 것이지… 당장의 이익을 놓아두고 주의 뜻을 살피며 복음을 바란다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도 더욱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결코 놓아두지 않으신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30:22).” 이를 오늘 바울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하나님은 그의 자녀이면 죽여서라도 살리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결코 우리가 세상과 같이 정죄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9:24).”
오늘을 달려 나가는 까닭은 이제 이 사실을 아는 것이다. 결국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 이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 하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시 59:1).” 이를 앎으로 이를 바란다. 그럴 때 나는 힘이 없고 또한 그 마음이 늘 미혹되기 일쑤이나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16).”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로 피한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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