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고전 14:1, 40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편 64:9-10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기위한 게 아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그러나 감출 수 없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3-14).” 소금과 빛은 숨길 수가 없이 드러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이는 우리 스스로 그럴듯하게 드러내는 위장이 아니다. 다니엘과 같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하나님 앞의 의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우리를 성도라 하고, 이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는 나 이상의 나이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 이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 내가 준비할 수도 없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12:12).” 실은 우리도 우리 자신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우리는 우리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한다.
아주 가끔은 누가 나를 어려워할 때 내가 우쭐할 일이 아니다. 저는 내 뒤의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상한 기억 가운데 하나가 있다. 그때는 엉망으로 살던 때였다. 어느 모임에 갔다가 빠져나오면서 동행했던 누가 이끌어 재미로 점을 본 적이 있다. 길거리 포장마차 같은 데서 사주관상을 보는 늙다리 영감이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저가 내 점괘를 읽지 못했다. 생일을 묻고 무슨 쪽자 꽂이를 뒤적여 막대 하나를 꺼내 보고도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심지어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가? 하고 물었다. 재미삼아였다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것에 동요되지 않는다. 그리고는 점 값으로 낸 돈을 돌려주었나? 그랬던 것도 같다. 좀 우스운 연관이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기이함을 체험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이는 우리의 마땅한 행실이 된다.
공사를 하는 이들에게 딸기우유 하나씩을 돌렸다. 인부들만 있어 그럴 때는 커피를 내주기도 한다. 마치 주인 행세를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내가 머무는 곳이 모두 주의 것이다. 전에 있던 누가 같이 세 들어 있는 입장에서 ‘나 같은’ 사람을 남들은 ‘호구’처럼 여긴다며 돌려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저가 당하는 느낌을 그리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 짐작했다. 누가 호구로 여기든 우리는 저희를 주의 마음으로 대하는 사명을 가졌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물론 우리의 호의를 자신들의 권리인 듯 행세하려 들 때면 마음이 상한다. 그러나 그 또한 저들의 한계다.
가끔 아이들의 가정을 두고 이런저런 우려와 염려로 저들을 안타까워할 때, 실은 저들이 우리보다 잘산다. 형편도 훨씬 낫고 이래저래 사는 행색은 비교가 안 된다. 그럼에도 안타까워하는 것은 주의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도리다. 설령 나 역시 세 든 사람으로 주인이 아니지만 막노동으로 녹초가 된 이들에게 대신하여 물 한 잔 내주고, 걸레질 한 번 하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요 18:20).” 우리는 숨김이 없고 단순하다. 드러내놓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덕을 기리는 일이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전에 엉망으로 살 때는 이를 알지 못했다. 음흉하고 은밀하게, 돌려 말하고 떠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2:4).”
누구를 대하고 위하고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함은 그의 자녀임을 서로가 아는 것이다. 우리 집으로 오는 아이들을 대할 때도 같은 마음이어야지 아니면 지겹고 한심할 때가 많다. 어제도 한 녀석이 똥을 지렸다. 그걸 수건으로 대충 닦고는 나왔던 모양인데, 다들 냄새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나보다. 그런저런 일을 일일이 기록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이 그럴수록 그럴 수밖에 없는 그 가정의 사정이 있고, 영락없이 저들 영혼은 각기 막힌 담 같다. 지금 이 아이도 양쪽 다 재혼한 처지에 늦둥이로 낳은 아이다. 그러니 각각의 자녀와도 무려 스무 살 차이가 난다. 애지중지 키웠는지 천덕꾸러기로 키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는 자폐성지진아로 어디 다른 데서 받아주질 않은 모양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 아이에 대해서는 그나마 우리가 같이 신경을 쓸 수 있다. 누구는 멀쩡한데 자학을 일삼고 곱고 발랄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정신과 치료를 받고 다니는 아이도 있다. 들춰보면 도두라진 가정의 문제가 그들 영혼의 문제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저들을 무슨 수로 대할까?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1, 40).” 기본 전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며’이다. 그 사랑은 신령한 것이다. 우리의 감정이나 어떤 느낌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기도하고 중보하고 함께 권면하고 위로하고 이 모든 것을 나타내야 하겠으나, ‘특별히 예언’이다. 곧 우리는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우리가 애써 그리 행세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성령으로가 아니면 할 수가 없다. 빤히 호구 잡히는 것을 안다. 저가 나를 우습게 여기는 것도 안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저의 시선은 아랑곳할 게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함은 영생으로 거두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 때 우리는 누가 뭐라든지 품위 있게 한다. 주 안에서의 질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곧 우리가 아이를 대할 때 또는 저들 가정의 일을 알게 되면서 단순히 혀를 끌끌 차는 업신여김이나 동정으로가 아니다. 하다못해 냉장고에서 뭐라도 꺼내 일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것은 ‘저들이 교회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내가 있는 곳이 교회다. 내가 머무는 곳이 거룩해야 한다. 이는 내 안에 주가 거하심을 아는 것이다. 남들이 어찌 여기든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 곧 스스로의 우월함을 과신하는 게 아니라 나의 연약함으로 주 안에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예언한다.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야 한다. 이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이를 알고 사는 삶이란 얼마나 고귀하고 품위 있는 삶이던가. 결코 나는 나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일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그러므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고로 내가 저에게 권하는 우유 하나 물 한 잔이 대수가 아니라 그와 같은 마음이 고상한 것이다. 내가 주인도 아니면서? 하면 그저 세입자로 있을 뿐이지만 쓸고 닦고 내 집처럼 구는 것은 이곳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주시기를 항시 기도한다. 아이와의 이런저런 사건을 아내가 저녁 먹으면서 또는 가정 예배드리기 전에 미주알고주알 말할 때 그와 같은 사실을 토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할 일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이를 확신하며 사는 날들이 복되다.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4-5).” 이를 오늘 시편으로 함축하면,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우리의 삶으로 그런 위력을 지녀야 한다. 곧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9-10).” 우리가 그럴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주께로 피하는 삶이었다.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2).” 그러므로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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