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8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65:4
하루하루가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그 날이 그 날 같고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으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 간다.’ 이를 아는 것은 인위적으로 무엇을 연마하여 얻은 결과로써가 아니다. 내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보는 것이 전에 것과 다르고 말하는 것이 전에 것과 다르며 생각하는 일이 전에 것과 다름으로, 더딘 것 같으나 확실하고 막연한 것 같으나 실질적이다. 그러니 모든 게 다 때가 있어,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 3:2-8).
그런저런 때가 있다는 것은 지금은 아닐 수 있고, 지금이 그러할 수도 있으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이겠다. 곧 오늘 말씀도 이를 일깨우며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여기서 이러고 있는 이때가 전부인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곧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36-38).” 이를 묵상하는 것이 천국에서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한다. 이는 말씀으로다. 요 작은 씨앗이 어찌 저 소담한 꽃무더기가 되었는지, 씨로 있을 때에는 그 다음을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전혀 다른 형태의 존재로 변화된다.
그러므로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곧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39, 40-41).” 그 각각의 영광이 어떠할까 하는 데 따른 ‘즐거운 상상’은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며 말씀으로만 소망을 품게 한다. 그렇게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2-44).” 영의 몸이 어떠할지, 그 영광이 어떻게들 서로 다를지, 그 조화나 형색이나 모양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 요지경인 오늘의 이때에서 흔들릴 거 없다. 남은 어떠한데… 하고 주눅 들거나 부러워 할 일이 아닌 것은 결코 오늘, 이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임을 잘 안다.
이에 오늘 시편은 명료하였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우리가 언제 어떤 만족함을 느껴보았던가? 여기에서의 만족은 제한적이고 곧 지나면 흐지부지 도로 사라지고 말 것이지만, 그럼에서 오늘 이 한 날에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10).” 아주 가만히 하루를 돌아보면 그저 그냥 ‘또 하루 같은’ 그런 날이었다 싶은데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는 자주 이 말씀을 음미하고 되새기며 ‘즐거운 묵상’을 한다. 성긴 머리와 늘어지는 피부를 보며 아내의 성화가 지청구로 변하기 일쑤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늘의 나는 장래의 나를 상상도 못할 정도로 전혀 다른 나일 것임을 안다. 곧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시 65:11-12).”
하루하루의 삶에서도 이러한 충만함을 느끼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서 우리가 누릴 영생의 삶에 대하여는 말이 필요가 없다. 가령 어제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고 뭐가 뭔지 뒤죽박죽 먼지를 뒤집어쓴 공사현장을 바라보며 주인은 조금씩 형태를 갖춰가며 앞으로의 모습을 설명하였다. 곧 저의 머릿속에 그려놓은 형태가 있고 이를 실제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으며 곧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결과가 있을 것이다. 이는 모두 각각인 것 같으나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였다. 복도에 쌓인 자재만으로는 상상도 못한다. 여기저기 뜯기고 덧씌워 흉물스런 과정에서는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다. 하물며 아주 일시적인 저것들도 그러한데 하물며 영생의 삶을 두고 과연 우리는 얼마나 소망을 품고 기대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13).”
나의 모자란 상상은 시편을 통해 꿈꾸게 된다. 환히 비추며 그 모양이 선명한 것을 보게 한다. 그러므로 이에 뒤질세라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바울은 이 아침 말씀으로의 상상을 돋운다. 곧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51-52).” 모든 때가 있었고, 모든 때가 이를 것을 아는 것과 같이 그때에 이르러 나의 사소하였던 기다림은 어떻게 변하여 주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있을까?
나는 어제 다윗이 비참한 현실을 비통히 여기면서 비탄에 젖어 시를 쓰는 데 있어, 저가 실은 바라보고 있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 54:1).” 이때에 다윗은 십이라는 황무지에 숨어 있을 때에 그곳 사람들이 사울에게 밀고하여 다윗은 다시 필사적으로 도망하며 그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삼상 23:19-23). 저는 쫓기면서 그와 같은 문제의 해결점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저가 아는 앎은 오늘 내가 아는 앎과 다르지 않게 말씀으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 33:27).” 주가 이 모든 일을 해결점이 되실 것을,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이를 알고 고백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오늘은 그 고충이 아무리 중하다 해도 대수롭지가 않다. 주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와 같은 약속으로 말씀하신 바 있다. 이를 믿고 붙들고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복이었다.
첫째, 하나님은 반드시 의인의 억울함을 도말하신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단 7:22).” 우리의 결국은 성경이 증명하신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둘째, 하나님은 반드시 성도의 삶을 세상의 재앙에 맡겨두지 않으신다.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91:5-6).” 셋째, 그러므로 우리의 강청은 주가 들으신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이를 쫓기면서 다윗은 알았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54:2).”
이를 반증하는 사례는 세상이 그저 그렇게 잘되게 놓아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3).” 비록 우리도 덩달아서 고통 가운데 내몰리는 것 같으나,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이는 엄연한 결과여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아직은 때로 모르겠다 해도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있음으로 우리는 반드시 안다.
이를 다윗은 붙들고 믿은 까닭에,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곧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시 54:4, 5).” 우리가 애써 이루는 것이 아닌 주께서 이루어 가고 계시는 놀라운 세계를, 우리는 마치 하루하루 퍼즐 조각을 들고는 알 길이 없다. 그렇게 하나하나 맞추어서 비로소 완성되는 세계에 대하여 오늘 바울은 본문에서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은혜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곧 오늘의 나는 오늘의 나로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과 염려와 불안과 반목으로 흔들리며 살았던가? 그때마다 주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하시며 이 일의 결국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다시 다윗의 시로 확인하면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시 54:6-7).” 낙헌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예물이다.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사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을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민 15:3).” 곧 우리가 지금은 볼 수 없으나 믿음으로 그 소망을 알고 소망으로 앞서 드려지는 감사로도 안다. 이는 믿음의 본질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그러므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어떻게들 그럴 수 있었을까? 하고 말씀을 되새기다가도 나의 하루하루 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나의 반복이 곧 주의 영광이 되는 그 날이 되면 알 수 있겠다. 엄연한 사실은, 이를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에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 어떻게 이를 믿게 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13).” 고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14-15).”
오늘도 이처럼 말씀으로 새 힘을 얻는다. 이를 위해서도 나는 일찍 자고 일찍 눈을 떠서 말씀 앞에 앉는다. 나의 하루 일과 중에 이보다 더 좋은 시간도 없다. 곧 마음은 불안에 휩쓸리고 어떤 일에 혈기도 나고 전혀 달라진 게 없이 또한 아등바등 사느라 사는 일에 바삐 움직이다 이와 같은 감격을 잠시 잃곤 하겠지만…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53).” 하시는 말씀 앞에 아멘, 한다. 고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 그때에는 우리로 오늘을 억압하던 사망이 모두 헛것임을 알게 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 이보다 통쾌한 상상이 또 이디 있을까? 결코 우리의 즐거운 상상은 상상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으로 새 힘을 얻는다.
이에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 65:1).” 나는 확신한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비록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2, 3).” 이는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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