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54편 /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전봉석 2021. 5. 28. 09:40

 

210530 주일

 

시편 54편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들어가는 말

오늘 시편은 다윗의 비탄 시라 할 수 있다. 사울을 피해 다니는 도피(B.C. 1020-1010) 생활 가운데 오늘 본문은 ‘십’이라는 황무지에 숨어 있을 때였다. 그곳 사람들의 밀고로 다윗은 위기에 처한다. 그런 가운데 쓴 시편이다(삼상 23:19-23). 이러한 비탄(悲嘆) 시는 시편 전체에서 열편 정도로 구분된다. 그 가운데 35편과 오늘 54편은 그 내용이 유사하다. 하지만 35편은 ‘도피 생활로 지쳐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는 시였다면, 54편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한계를 통해, 전능하신 구원자 하나님을 더욱 바라고 자신의 구원을 호소하는 시’라 할 수 있다.

 

오늘 시편을 3연으로 나누었다. 1연(1-3절)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강포한 자들로 인한 위기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이다. 2연(4-5절)은 그렇게 쫓기는 중에도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며, 더욱 확실한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3연(6-7절)에서는 전능자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앞서 자신의 믿음으로 감사를 서원하는 내용이다.

 

1연(1-3),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강포한 자들로 인해 그와 같은 위기상황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 54:1).” 실제 우리는 모두 참 고약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상하게 어려움이 터져야 주를 찾는다. 좋을 땐 느슨하여서 하나님을 바로 구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려움이 닥치면 간절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는 죄의 본능이다. 하물며 강포한 자들은 오죽할까? 저들은 평소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그런 저들과 우리는 그 사이가 어그러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를 누구는 사회성이라고 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 하며 심지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들 문화에 흡수되어 산다.

 

솔직히 다윗이 다윗일 수 있었던 것은 저의 숱한 역경이 아닐까? 더는 바랄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나를 변호하여 주시기를’ 주께 바란다는 것은 어려움으로 얻는 수확이다. 성경은 이를 증거 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 33:27).” 곧 우리 문제의 해결점은 하나님뿐이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이를 깨닫는 데까지 우린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자기고집으로 부대비용을 지불하며 살고 있나? 어떤 이는 건강을 잃고, 어떤 이는 그 숱한 세월을 다 보내고, 누구는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야 주의 크신 능력을 구한다! 일찍이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며 손을 내미셨다.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에 대한 근거를 들어보겠다.

 

첫째,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억울함을 도말하신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단 7:22).”

 

둘째, 하나님은 반드시 성도를 세상의 재앙에 넘겨주지 않으신다.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91:5-6).”

 

셋째,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강청을 들으신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이를 다윗은 그의 수많은 역경을 통해 깨달았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54:2).” 하고 저는 쫓기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다시 보면 주가 들으실 것을 아는 자의 부름이다. 곧 우리의 호소는 주께 들려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에게 의존한다. 그러느라 인생을 너무 많이 허비한다. 후에 허무함을 붙들고 주께 돌아오는 경우는 다들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를 다윗은 알고 있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39:5).” 그러니 인생을 의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허무할 뿐인지,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03:15).” 한 구절의 시로 함축된다.

 

오늘 다윗의 호소도 같다.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54:3).”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그들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자들을 경계한다. 저들은 자주 ‘적당히’를 사용한다. 위안과 평안을 도모하는 정도로 족한 것이다. 자신들 보기에 지나치면 ‘광신자’라 이른다. 그러나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다. 새옹지마란 변방 새(塞), 늙은이 옹(翁), 어조사 지(之), 말 마(馬)자를 써서… 변방에 한 노인이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기르던 말이 오랑캐의 땅으로 달아났다. 동네 사람들은 저를 위로하고자 말을 거드는데, 저는 ‘누가 알겠나?’ 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던 말이 그곳 땅의 말 한 마리를 데리고 온 것이다. 새옹은 ‘그러게, 오늘 이 일이 화가 될지 복이 될지 누가 알겠나?’ 하는 말로 이 또한 받아들였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한데 주님은 우리에게 엄히 가르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우리는 운에 따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2연(4-5), 쫓기는 중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깨달으며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다.

 

오늘 다윗은 이를 우리에게 일깨운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오늘도 우리를 돕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곧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5).” 이는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 이루는 게 아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처럼 말씀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주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우리는 우리 인생을 주의 반석 위에 건설해가는 집과 같다. 이는 훗날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25).” 우리는 이를 목격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6-27).”

 

3연(6-7)에서는 전능자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앞서 믿음으로 감사함을 서원하다.

 

이를 앎으로 다윗은 서원하였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시 54:6-7).” 낙헌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다.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사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을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민 15:3).” 곧 우리가 지금은 알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다고 하나, 믿음으로 이를 받아들임으로 소망을 안고 감사로 드리는 마음이 낙헌제이다. 곧 믿음의 본질도 이와 같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바라는 것은 아직 실상이 아니다. 실제가 아닌 것을 믿음으로 투자하는 것이다. 전에도 예를 든 것처럼 아직 허허벌판으로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모델하우스를 보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부지런히 저축을 하며 견뎌내고 이겨낸다. ‘보이지 않는 증거’는 본 게 아니라 ‘본 것처럼’ 믿는 것이다. 곧 우리의 의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그에 따른 말씀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곧 능히 이루실 줄을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우리가 취한 게 아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자고로 믿음이란 처음도 과정도 끝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이에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 65:1).” 오늘 시편의 낙헌제와 같이,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2).” 그렇게 우리도 여기에 나왔다.

 

나오는 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믿음으로 소망을 품고, 소망으로 사랑을 행하며, 사랑으로 믿음을 준행하며 산다. 이에 우리의 특징은, 첫째, 농부와 같이 기다릴 줄 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둘째 이를 견디며 미혹당하는 일을 주의한다.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눅 21:8).” 셋째, 우리는 소중함을 앎으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덧붙여 설명하기보다, 그렇다면 자신을 돌아보며 오늘 말씀을 마치자. 첫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과연 그 구원을 이뤄 가는데 평소 신중한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둘째,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셋째, 깨어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넷째,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는가?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다섯째, 자신의 죄를 비통하는가?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여섯째, 말씀에 자신을 내어맡기려는 의지가 있는가?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시 111:2).”

 

오늘 다윗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낙헌제를 올린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54:6).” 저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선하심을 찬양할 수 있었을까? 확신하는 믿음으로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