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56편 /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전봉석 2021. 6. 10. 14:19

210613 주일

 

시편 56편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6: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 56: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시 56: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들어가는 말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 10:12).”

 

자부심, 이를 마치 자존감이 강하고 진취적인 기상으로 해석하며 권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 뜻대로 자기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믿고 이를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서로 격려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높임과 낮춤이 하나님의 권한인 것을 상기시킨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6-7).”

 

본문이해

 

오늘 본문으로 바로 들어가면, 이 또한 다윗의 비탄 시이다. 저는 평생을 도피생활로 단련되었다. 본문의 배경은 사울을 피해 블레셋 가드로 피신 중에 지은 것이다(삼상 21:10-15). 저는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고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13).” 그 신세가 얼마나 처량한가? 저들도 조롱하기를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하며 시시덕거린다(14).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 행여 우리가 누구 앞에서 이 짓까지 하며 목숨을 연명하고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목숨을 건지고 쫓겨나서 다윗은 기도를 쓴다. 저의 시편은 모두가 기도다.

 

굳이 오늘 본문을 나누어본다면 1연은 1-4절, 위기 상황에서 다윗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한다. 2연은 5-9절, 그렇게 떠돌며 유리하는 자신을 주께 호소한다. 그리고 마지막 3연은 10-13절, 그럼에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 받을 것을 확신하며 주께 서원한다.

 

1.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1-2).”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린 누구에게든 도움을 바란다. 살려주세요,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이때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하고 말할 수 있는 자 몇이나 될까? 우리가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늘 보면, 사람 위에 사람 있다. 그래서 권력이 좋은 것이다. 의사, 검사 하는 직종의 사람 하나만 알아도 그게 또 큰 위세가 된다. 그러니 가만 보면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아니 그런가? 아니꼽고 치사해도 직장 상사 앞에 굽실거리고 돈 주는 놈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게 인생사다. 소위 ‘갑질’이라 할 때, 당할 땐 ‘을’이 되지만 돌아가면 저 자신이 ‘갑’이 되는 게 이치다. 동대문에서 뺨 맞고 서대문에서 화풀이 한다는 말도 그런 의미다. 그러니 사람의 압제는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는 숙명과 같다. 이때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하고 이와 같은 상황을 주께 호소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고귀한 특권이다. 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저는 천지를 지으셨고 모든 만물의 주가 되신다. 하면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세상을 추구하느라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이보다 어리석은 게 어디 있겠나? 곧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하고 성경은 엄연히 우리에게 경고하셨다(사 31:1-3). 이에 사는 게 고달프다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이것이 은총인 것이다.

 

2. 두려움 중에 하나님을 의지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3).”

 

오늘 본문으로 읽은 내용이 우리의 기지(機智)다. 곧 우리의 재치고 지혜다. 또한 우리의 기개(氣槪)다. 굴하지 않고 씩씩한 절개인 것이다. 세상 어떤 사람도 두려움 없이 살 수 없다. ‘헛되고 헛되다’는 정의는 모두에게 속하는 인생의 보편적 상황이다. 아무리 신앙이 좋고 믿음이 뛰어나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저 안에 어찌 두려움과 불안이 없을까! 그럴 때 우리는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하는 의지가 분명한 사람들이다. 내가, 내가 하고 두 번씩 반복하여 쓴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결코 수동적인 게 아님을,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정도의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이어서 보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4).” 여기서 우린 놀라운 역설을 본다. 즉 우리의 두려움이 그로 인한 고초가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를 바울은 놀라운 언변으로 재해석하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곧 오늘 우리의 어려움이 우리로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소중한 진리를 가졌는가를… 이것으로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를 동감하겠나? 다윗의 기도로 다시 들어보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10-11)

 

실제 보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적당히 부유하고, 적당히 건강하고, 적당히 살만한 사람들의 신앙은 그야말로 적당히 믿는다. 그렇게 대단히 간절하지 않다. 굳이 크게 애쓰지 않는다. 주일이면 교회 가고, 성경도 기도도 그럴 수 있는 여가시간을 이용해서 읽고 바란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이 있었으니,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살면서 이를 권하고 근심하는 삶을 추구하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와 같은 기도가 우리 자신의 것이어야 하지 않겠나?

 

3.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안전하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4).”

 

여기서 보면 핵심은 하나다.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곧 말씀을 붙들고, 말씀으로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하는 말씀으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이 말씀은 단지 구두로 계약한 게 아닌 이미 공증을 마친 계약서류와 같다. 아무도 이를 번복할 수 없다. 고로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보고, 느끼면서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인 자신들의 책임이다. 왜?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3).”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우리에게는 담대하게 주의 앞에 나아가고 도우심을 구할 수 있는 증명이 있다. 이것이 말씀의 위력이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우리는 지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하여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주가 우리와 함께 하심을 우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확신하는 것이었으니, 이를 위해 사도들은 복음서를 기록하였고 앞서 구약의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들의 기록을 성경으로 남겼다. 하여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이를 기록한 이는 상상으로가 아니다. 생생한 증언으로 우리에게는 성경이라는 말씀의 증명이 있다. 고로 이를 믿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도우신다.

 

나오는 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우리가 사람으로 사는 동안 사탄은 쉴 새가 없다. 호시탐탐 노리는 맹수 같이 거침이 없다. 곧 저들은 이 땅의 권세 잡은 것들이라. 우리 또한 이에 굴하며 살지 않았던가?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이를 누구보다 처절하게 경험한 베드로 사도의 증언으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한다. 저는 우리에게 “근신하라.”고 한다. 근신이란 삼가 조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정기간 떨어져 격리되기도 한다. 가령 전염병에 걸린 사람과 강제로 떼어놓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또 “깨어라.” 하고 단호히 외친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졸음운전이 음주운전보다 치사율이 높은 것도 무방비 상태와 다를 게 없어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하나?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저는 우리의 대적이다. 안 믿는 자들이나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그래서 실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방법 중 가장 확실한 것은 마귀를 대적하지 않고 저와 친분을 쌓고 사는 것이다. 거짓과 위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서로의 존중과 화합을 무슨 대단한 업적인 양 자부하며, 안 믿는 자들과 타종교와 타협하고 동조하며… 그러는 세상에서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하고 엄히 증거한다. 실제 믿음을 지키며 산다는 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하여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시 56:10).” 지금 다윗의 상태를 상상하며 읽어보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11).” 그럴 수 없는 중에 그러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말씀을 통해 우리의 놀라운 특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깊이 붙들며, 오히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하는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