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55편 /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전봉석 2021. 6. 4. 08:07

210606 주일

 

시편 55편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들어가는 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성경이 일관되게 외친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시 39:5).” 돌아보면 인생은 한 뼘 길이 같다. 하여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6).” 마치 이 한 문장으로 인생을 축약하는 것 같다. 이를 알 때,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우리의 고백이 귀하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를 바울은 그러므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즉 우리가 아뢰는 기도는 감사다. 바라는 요구가 핵심이 아니었다. 다들 벌어먹고 사느라 꼴딱꼴딱 숨이 넘어간다. 그런 지경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리를 대신하시는 성령이 아니시면 우리는 모든 게 허사다.

 

본문에 앞서 인생을 언급한 까닭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곧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후 4:17-18). 이를 먼저 깊이 새기고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자. 안 그러면 자칫 인생무상(人生無常) 허망할 수가 있다. 속된 말로 오늘 다윗을 보면 헛살았다! 자식 압살롬이 반역을 하고 친구 아히도벨이 배신을 했다. 오늘 시는 저들에게 쫓겨 도망치며 지은 시이다. 그야말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할 만한 인생이다. 훗날에 이사야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하고 인생을 정의하였다.

 

그런데 좀 의아한 것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하는 다윗의 고백이다.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아니, 지금 그 신세로 이게 과연 할 소린가? 오죽하면 자신을 객관화하여 이르는 말로 말이다.

 

본문이해

B. C. 797년에 다윗은 친구 아히도벨에게 배신을 당한다. 저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편에 서서 역모에 가담했다. 다윗은 황급히 궁을 떠나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삼하 15:1-18).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12).”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시 55:1).”

 

다윗은 평생을 쫓겨 다니며 숙련된 신앙의 소유자다. 저는 낙담할수록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아뢴다. 낙담(落膽)은 떨어질 낙(落)에 쓸개 담(膽) 자를 쓴다. 곧 인생이 바닥에 곤두박질쳐져 쓰디쓴 맛을 보는 순간을 의미한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붙드는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교회의 임무는 말씀이고, 설교자의 의무는 말씀이다. 말씀을 의지할 줄 모르면 낙담할 때에 그야말로 붙들 수 있는 지푸라기조차 없다.

 

요즘 한참 고가의 사치품과 호화스런 여행 상품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코로나로 억눌렸던 감정을 소비와 사치로 풀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덩달아 안 믿는 사람들처럼 굴다가는 기도에서 감사는 빠지고 요구만 잔뜩 남게 된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시 69:33-34).” 우리의 찬송은 매순간의 기도다. 가장 무서운 일은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숨으신 것 같은 때이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앞서 언급하면, 오늘 이 말씀은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우리의 믿음은 무엇으로 단련되는가? 믿음을 돋우는 것은 말씀이고, 확실히 매는 것은 약속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이와 같은 말씀이 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확신이 들 때, 다윗의 기도가 내 것이 된다. 다시 이어서 보자.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시 55:2).”

 

이를 베드로는 깨달았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누구의 근심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고, 스스로 위로를 얻을 수 없다. 안 믿는 자들이야 끌리는 대로 잠시의 위로를 우선하지만, 우리가 저들처럼 위로를 얻으려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실제 사탄의 적은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8-9).” 그렇게 사탄은 믿는 자의 틈을 노린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행여 우리의 낙심(落心)이 저의 공격에 빌미가 될 수 있다.

 

이에 다윗은,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하고 주께 아뢴다. 이는 주의 뜻을 꺾고 내 뜻대로 해달라는 소리가 아니다. 비록 나의 수준이 바닥이라 해도 주의 긍휼하심으로 내 수준을 살피소서, 하는 의미다. 우리는 근심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시 55:3).”

 

물론 우리는 당면한 문제로 호소한다. 이때 교회는 말씀으로, 목사는 설교로 우리의 상한 심령을 붙잡아야 한다. 단순히 위로와 평안을 위안으로 삼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욥의 고백은 우리의 정도(正道)가 되어준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순간 떠오른 일화가 하나 있다. 부산 어느 교회 목사의 이야기다. 저는 공학도로 유학길에 오른 상황이었다. 그때 비행기 안에서 한 노부부를 만났다. 저들은 평온히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닿아 어디 가시는 길인가? 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실은 저들 부부는 유학중에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는 길이었다. 뭐라 위로를… 하고 말을 흐리는데, 그동안 유학을 보낸 것과 같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니, 감사하고 있었다. 하고 저들 부부는 가만히 대답하였다. 이에 돌이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의 고백은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두시는 믿음이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시 55:4-5).”

 

오늘 시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서 도망치며 지은 기도이다. 그때 누가 좇아오며 조롱하고 저주한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삼하 16:7-8).” 가소로운 저의 조롱에도 다윗은 그것까지도 받아들이며,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10)”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오직 하나님께로 우리 마음이 향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를 우리는 신뢰한다. 물론 우리는 이를 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 흔들리고 낙심할 때도 있다. 우리보다 앞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그렇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로 끝까지 믿게 하시는 믿음으로다.

 

나오는 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우리 안의 착한 일이 무엇이겠나? 모두 덜어내고 오직 한 가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우리의 선택의 문제다. 받아들일 것인지, 스스로의 위로로 대신할 것인지? 그렇게 흔들리기 쉬운 우리의 연약함으로 우리는 주께 아뢴다.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시 55:2).” 곧 우리의 수준은 누구보다 주님이 더 잘 아신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3-14).”

 

둘째, 그래서 날마다 우리 짐을 대신 짊어져주신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시 68:19).”

 

셋째, 그리고 하나님이 대신 행하신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넷째,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일으켜 하늘에 앉히실 것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결론, 오늘도 우리의 걸음을 지도하신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