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0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편 76:10
약함을 자랑한다는 말에 동감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것은 내게 주시는 은혜다. 나로 만족하게 하는 것이다. 주는 약속하시길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시는 데 따른다. 약함으로 주의 은총을 구한다. 도우심을 바란다. 소리꾼 누구의 방송을 잠깐 봤다. 저의 삶은 굴곡져 있었다. 방송에 비치는 모습과 실제의 고초는 괴리감이 들었다. 오죽하니 심한 공황으로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가. 저의 소리는 깊었고 구성져 듣는 이의 마음을 구슬프게 했다. 곧 우리의 약함이 우리로 단단하게 한다.
한데 여기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 그것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며 부득불 약함을 자랑한다는 사도의 일갈을 듣게 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하지만 이것이 좋고 즐겁고 신나는 일이어서는 아니다. 약함은 실제 우리로 노엽게 한다. 힘에 부쳐 원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있다. 그릇 행하여 곁길로 가게도 한다. 이를 미화시켜 ‘고통은 축복’이라는 논리는 억지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이어서 보면,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우리 삶에 남은 노여움이 어찌 없겠나? 믿음으로 주께 돌려 감사로 찬송하게 한다 해도 ‘남은 노여움’에 대해서는 ‘주께서 금하신다.’ 먼저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3).”
남은 노여움으로 자신을 무장하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탄과 같이 된다. 오늘 본문은 이를 상기시킨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이것은 스스로의 의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견디어온 세월과 참고 인내하며 이룩한 것에 대한 자부함이다.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엄격히 경고하신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렘 4:3).” 묵은 땅을 갈아엎어야 한다. 묵은 땅이라 하면 버려져 가시덤불과 돌무더기로 황폐해진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그런 상태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4).”
곧 나의 약함이 나로 안주하게 하고 태만하게 할 수 있다. 자기연민으로 남과 견주며 서러움에 묵인하는 날들이 늘어날수록 묵은 땅으로 버려져있다. 어제 누구와 잠깐 통화하다 가정의 소중함과 교회의 거룩함에 대하여 새삼 깨달았다. 곧 인생을 살면서 온전한 가족 구성원과 가정을 이뤄 믿음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가. 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데 있어 온전한 교회를 만나 영적으로 나태하지 않고 성실하게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하고 값진 은혜인가. 평생을 고약한 부모 밑에서 형제들 간의 반목으로 오늘까지도 힘에 겨워 눈물로 주께 아뢰는 날들이 많이 있으니, 어찌 위로 할 말이 없어 나의 시름은 깊기만 했다. 갈아엎지 않으면 답이 없는 땅이다. 이를 사도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로 비유하였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지난 것이나 정에 억매이지 말아야 한다.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누구에게 나는 아침마다 묵상글을 보낸다. 녀석은 그것을 읽기는 하는지, 괜한 짓을 하는 것 같다가도 나는 죽어라 하고 보낸다. 곧 나이 서른인데 변변한 직장도 인생의 목적도 없이 먹고 자고 하느라 살만 쪄 둔한 몸을 이끌고 살아 있다. 지난날 이런저런 상처에 대하여는 울어먹듯 되새김질해서 뭐하겠나? 무기력과 나태가 저를 옭아맸다. 어르고 달래 타이르기도 하고 야단도 쳐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한 번 읽어볼래? 하고 보낸 글을 계기로 나는 줄기차게 묵상을 보낸다. 말씀으로밖에는 달리 기회가 없어서이다. 문득 누구엄마도 생각이 난다. 일찍이 이혼을 당하고 아이 둘을 억척스럽게 키우던 이가 어느 날 발이 묶였다. 문 밖으로 나가지를 않고 종일 소파에 누워 두려움을 호소한다. 아이의 부탁으로 몇 번 통화도 하고 문자로 말을 걸었으나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았다. ‘묵은 땅’은 그 영혼의 버려진 그늘이다.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지 않고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호 14:7).”
주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의 남은 노여움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어떤 어려움이 깊을 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영혼은 귀하다. 어제도 잠깐 표현한 것처럼 우리 인생은 ‘낀 시간’에 불과하다. 여기서 저기, 그 사이의 시간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위해 아등바등 기를 쓰고 사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도 없고, 그것마저 방치한 채 무기력증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도 슬픈 일이다. 나는 시편을 묵상하고 설교원고로 준비할 때마다, 어찌 저런 지경에서도 주를 바라며 찾았나? 싶을 정도로 매번 감동을 받는다. 다윗이 블레셋 가드에 숨어들어 있다 잡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자 미친 체하며 침을 질질 흘리면서까지 연명해야 했던 목숨에 대해,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시 56:1).” 주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밖에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이를 알 때 우리의 남은 노여움, 약함으로 더는 견디기 어려운 것을 가지고 주께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어제는 일찍 병원에 가서 피를 뽑고 이것저것 검사를 했다. 몸은 날로 낡아간다. 우리의 겉사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을 맞는다. 그럴 때면 주를 더욱 바람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원리,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감사히 여길 줄 아는 게 놀라운 은혜다. 그런데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가는 일은 화있을진저,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 31:1).” 그럴 때는 그게 그저 전부인 줄 알았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꿈꾸며 남들처럼 사는 게 행복인 줄로 알았다. 한데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2).” 주께서 치신다. 주의 쟁기질에 남아날 무더기는 없다. 결코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3).”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 복이다. 눈으로 이 말씀을 볼 수 있는 게 복이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이를 복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마음이 복이다. 누구에게 저의 힘듦을 위로하고 인정하며 그것으로 주의 도우심을 약속하고 말씀을 설명하여도 듣지 않으려하면 더는 방도가 없다. 나는 누구를 대하다 더는 어쩔 수 없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마음이 아프다. 누구엄마에게 더는 연락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더는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 아침 내가 저들을 기억하고 그와 같은 사연을 묵상글로 쓰며 주께 아뢰는 것을 저들은 알기나 할까? 주의 성령이 일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는 게 마치 날마다 당하는 사형선고 같다. 이런저런 사연이 뉴스를 가득 채우고, 저들의 죽음 같은 날들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우리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다.
며칠째 허리가 아프고 어깨며 어디고 안 아픈 데가 없어 짜증스럽다. 나의 노여움이 주를 찾고 주의 돌보심을 바란다. 이는 찬송이다. 그러나 남은 노여움은 하등에 쓸모가 없다. 나를 무력하게 하고 낙심하게 한다. 어느 소리꾼의 고백과 누구의 절망어린 무기력증과 누구엄마의 방임이 나로 경각심을 갖게 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다른 더 좋은 수를 나는 알지 못한다.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다.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대하 14:11).” 누구의 호소가 오늘 나의 간절함이 된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산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는 기도가 내 것이 된다. 그렇게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11:30).” 그것이 나로 주 앞에 더욱 간절하게, 하여 나의 노여움이 찬송이 되게 하실 것을.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그리하여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0) | 2021.06.10 |
---|---|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0) | 2021.06.09 |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0) | 2021.06.07 |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0) | 2021.06.06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0) | 2021.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