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전봉석 2021. 6. 10. 05:42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 13:5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시편 78:40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아들에 대한 마음으로 묵상하게 된다. 성경은 일러,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한데 이런 것에 대해 스스로 자신만 모른다. 가령 녀석이 공부를 하면서부터 말 수가 점점 더 줄었다. 그 나이 때 다들 그렇다고 하는 소리에 나는 어땠나? 생각하며 참고 기다리곤 하지만 그럴 때 근심하는 쪽은 언제나 부모이다. 열심히 목표를 세워 공부하느라 그러겠거니, 하고 이해하며 또 참고 두고 보지만 그러면서도 근심이 끊이지 않는 쪽은 나다. 안쓰럽고 신경 쓰여 신경 쓰이지 않게 먹을 것이나 쓸 것을 챙겨두곤 하는데 그것도 종종 눈치를 보면서 하다,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언제쯤 알 게 될까?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23-24).” 곧 우리가 사는 게 옛사람으로 아니라 새사람으로인 것을 어찌 말로다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로 인해, 성령은 우리의 생활을 두고 근심하신다. 먼저는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은 거짓으로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25).” 어떤 의미에서 거짓은 대수로운 게 아닌 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서로는 그저 ‘친절한 타인’ 정도에서 참된 것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거짓을 행세한다.

 

또 하나는 분내는 일인데 이 또한 사람이 살면서 어찌 분을 내지 않고 살 수 있겠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26-27).” 한데 이를 오래 품으면 사탄에게 빌미가 된다. 여기서의 분도 마땅히 쏟을 수 있는 성화다. 잘못된 것을 보고도 눈 감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다. 교회가 욕을 먹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데도 화가 나지 않으면 그것을 믿는 자로서 정상이라 할 수 없다. 교회 안의 그릇됨과 가정의 잘못을 바로 잡는 일도 올바른 분을 냄으로 가능하다. 한데 이 또한 오래 품지 말라는 것인데, 끌면 끌수록 본질에 대한 화는 어디 가고,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경우를 본다.

 

또 하나는 도둑질이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28).” 마땅한 것 이상의 것을 노리는 모든 현실이 도둑질을 종용한다. 정당한 대가를 쳐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이다. 남의 것을 아무렇지 않게 점유하고 선용하면 그것도 도둑질이다. 누구와 어떤 약속을 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것도 저의 마음과 시간과 그 이상의 것을 도둑질하는 일이다. 점점 우리의 일상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신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 모르는 척 눈 감고 마는 것들이 늘고 있다. 이어서 또 하나를 살피면 가장 흔한 말로다 짓는 더러움이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29).” 누구 말에 덩달아 동조하고 그런 것 같은 것을 두고 그렇다고 단정하기 일쑤다. 특히 요즘은 가짜뉴스가 판치고 거짓 정보가 넘치는데 이는 모두 더러운 말로 시작된다. 가장 저질스럽게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가 댓글문화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는 말을 나는 싫어한다.

 

이러한 것들, 거짓과 화내는 일과 도둑질하는 것과 더러운 말을 하는 것에 있어 우리는 별로 신중하지 않다. 그러려니 하고 그럴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러한 일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30).” 가만히 묵상하면 실제 그러고 있는 본인들은 가볍게 여기는 것을 두고 성령은 마음을 졸이신다. 어쩌다 그럴 수 있는 일이 굳어져 다반사로 그리 행하며 사는 일이 는다. 그 정도야, 하고 허용한 아주 작은 틈을 통해 물이 새고 둑이 무너진다. 이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1-32).”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것들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

 

모두가 내 이야기면서 그것으로 누구 때문에 염려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우리의 못나고 연약함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오늘 아침 말씀을 그리 읽는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아들에게 드는 마음으로 성령의 마음을 짐작하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주님을 슬프게 하였는지,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시 78:40).” 나야말로 염치가 없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어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다 나 때문에 성령이 그러하셨을, 하루에도 몇 번씩 근심하시며 주 앞에 대신 고하여 아뢰는 기도를 짐작하였다.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감당이 안 된다. 하여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시 78:37-39).” 나는 이 아침, 이 말씀 앞에서 한참을 머문다. 나의 죄악을 덮으시고 진노하지 않으시고 여러 번 돌이켜 오래 참으시고 분을 다 쏟지 않으심은 그저 나는 육체이고 바람인 것을 기억하셨음이다. 그때마다 또 마음을 졸이며 참고 기다리셨을 주님을 생각하면 오늘 내 안에 있는 근심의 출처를 알 것도 같다. 누구나 화가 난다. 보면 이게 다 화가 그 속에 많아서들 그렇다. 크고 작은 사회 사건은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별 것도 아닌 일로 욱, 하고 치미는 것에 대해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시 4:4).” 가만 좀 인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이 얼마나 값진 은사인가를 알게 된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이를 알면서도 이게 쉽지 않은데 그러면 어찌 해야 할까?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 마음에 심어지는 말씀으로밖에는 답이 없다. 말씀이 스스로 말씀으로의 역할을 하실 때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화로부터 놓여날 수 있다. 보면 실은 다 쾌쾌 묵은 감정에 점화를 하는 정도의 욱, 하는 화 때문이다. 일순간 올라온 감정을 적당히 분출하는 것이야 온당하고 합당하면 필요하기도 하다. 성경은 분을 내지 말라고 하지는 않으신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분을 내어도 오래 끌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사탄이 이를 가만두지 않고 기회로 삼기 때문이다. 가령 누가 화가 났다. 분에 겨워 어떤 일, 화가 난 일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데 듣다보면 예전부터 쌓인 것을 들추며 이번만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그만큼 자기 속에 담고 살았던 화의 근거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게 복이다. 어디 통계서 보니 홧김에 이혼하는 경우가 수두룩하고 홧김에 가출하여 탈선하는 청소년들이 수두룩하다. 요즘은 내 안에 화가 많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이를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을 구한다. 그러느라 하나님을 아들을 내 곁에 바짝 붙이신 것 같다. 아내는 종종 들으라고 하는 소리겠으나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 툭툭, 시비를 걸듯 핀잔을 준다. 가령, 아들 앞에서는 찍 소리도 못하면서! 하는 식으로 나를 무안하게 하는데 열 번 맞는 소리여서 면구스러울 뿐이다. 그 앞에서 뭐라 하지 못하는 마음이 화로 쌓여가지 않게 기도한다. 그와 같은 근심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 꼴도 보기 싫은데 공부하다 먹을 간식을 슬쩍 챙겨다 놓고, 행여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까 하여 누구 전화가 길어질 것 같으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온다. 그러면서도 항상 감사한 것은 서둘면서도 저녁마다 예배는 꼭 같이 드린다. 아직 엄마가 식사를 하고 있는데도 자기 수저를 내려놓기 무섭게 예배드려! 하면 뭐라 화가 날 법도 한데, 그게 어딘가 싶어 얼른 치우고 같이 예배를 드린다.

 

오늘 이 긴 시편의 내용을 읽으며 그때마다 하나님이 참고 또 기다리시며 수시로 근심하셨을 주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때마다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는데,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72).” 주의 능숙하신 손길로 오늘 우리의 미숙한 심령을 지도하신다. 이를 바울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논리적으로 구술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그리스도는 결코 약하실 수 없는 분인데 약하심을 자처하셨고 그와 같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에 오늘을 살면서 우리도 우리의 강함이 도리어 약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었다.

 

욱, 하고 치미는 어떤 화를 무작정 꾹꾹, 눌러서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이를 주의 긍휼하심과 같이 주의 마음으로 참고 또 기다리며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5).” 나를 돌아보아 점검한다. 그것은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9).” 하면 얼마든지 약할 수 있고 또 약하여서 주의 사랑으로 내 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하심이니,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2).” 성도의 길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3).” 주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심이었다.

 

고로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시 78:38-3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