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12:7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시편 77:13
어떤 어려움 앞에서 자신이 구하고 바라는 것이 무언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특권은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아뢰고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를 구할 수 있는 것, 곧 우리의 관심을 주께로 집중하게 하심이 귀하였다. 그럴 때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4).” 더는 사람을 의지하거나 세상을 바라지 않게 된다. 우리 믿는 자들의 태연함은 어디까지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27:3).” 이를 어찌 증명할 수 있을까? 나의 의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부터다. 바울은 그것을 알고 자신의 약함을 존중하고 받았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외람되지만 나는 종종 나의 어려움을 두고 그리 삼는다. 서럽고 야속한 일에 대하여 주의 선하심을 살핀다. 때론 힘에 겨워 쓰러질 때도 있지만 그것으로 또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려 하심인 것을,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시 77:13).” 내 안에 있는 이와 같은 고백을 주는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단언하건대 주는 나를 도우신다. 이를 위해 곁의 동행을 두신다. 믿음으로 걷는 저들을 주목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7).” 가령 어릴 때 흘려듣던 말씀이나 억지로 받아 적었던 말씀이 새삼 귀히 다가온다.
누가 서러워 엉엉 울며 전화를 했다. 이런저런 사정에 덩달아 마음만 애달픈데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나는 조금 일찍 나와 천천히 걸으며 주를 바라였다. 저의 마음을 위로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새삼 나의 복이 귀하다는 생각도 하였다. 믿음의 가정에서 같이 믿는 사람들과 가족구성원으로 산다는 것 자체야말로 엄청난 은혜다. 어릴 적 아버지의 강압적인 신앙의 요구가 이제야 귀히 여겨진다. 이제 나도 그리 행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저들은 아직 몰라서 그러는 것을. 누가 믿는 자를 욕하고 곁에서 그리 살다 어려움을 겪으면 마치 자신들이 옳은 양 입을 삐쭉거리는 저들을 두고,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 4:11).”
그러려고 의식적으로 그러는 가식으로가 아니라, 공사하는 인부들에게 커피를 내주고 권한다.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행세를 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시공간의 주인으로 사는 일이다. 나는 요즘 자주 놀라워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주의 애정이다. 저들의 것이니 저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런 가운데 그 어떤 것보다 귀히 여기는 저들의 존중이 때론 의아해서다. 먼저 위하고 생각하는 것도 놀랍다. 가장 작은 공간으로 구석진 자리였던 교회가 가장 큰 특실로 여러 개의 창을 가지고 있는 귀한 공간이 되었다. 저들의 속을 누가 알겠나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분명하였다. 그럴 때 나는 주의하여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그러니까 저들에게 그저 난 일개 세입자가 아닌 것이다. 목사로 불릴 때 이미 주의 영들이 나를 호위하심을 느낀다.
곁을 같이 하는 사무실 사람들과 별 것도 아닌 일로 서로 짜증을 내고 다툼이 생길 때 어쩌다 내가 그 사이에서 중재를 하고 있다. 저들 양쪽이 나를 어려워하는 까닭이 내가 뭐나 되어서이겠나? 보이지 않는 주의 권능으로다. 나는 가끔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과분함을 느낀다. 오며가며 인사를 할 때 누구에게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그리 행세를 해서가 아니다. 어제도 별 것도 아닌 일로 주인 부친은 옆 사무실 사람을 벼르고 있고 덩달아 누가 부추기며 불을 지피는데, 그러지 마시라 하며 나는 저의 어깨를 돌렸다. 실제 그 사무실 사장은 오며가며 인사나 안부를 묻고는 한다. 곧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로 그 어떤 사람과도 척을 질 이유가 없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이는 저들을 위한 게 아닌 나를 위한 평안으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그럴 수 있는 것은 주의 권위로 산다. 교회는 단지 사업장의 하나가 아니다. 목사나 신도의 신분은 단지 하나의 직업군이 아니다. 저들로 감히 함부로 여길 수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호위를 받는 사람들이다. 누가 퍽, 하고 운다. 저가 운전 중이라 나는 내가 불안하여 저를 달래며 그런저런 소식을 듣는다. 듣다 생각하기를 저가 내게 그처럼 목 놓아 울고 토로할 수 있는 게 우리의 어떤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겠나?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나때문이 아니다. 행여 이 귀한 은사를 잊을까, 소홀히 여길까 하여 주는 내게 가시를 두셨다. 나도 바울과 같이 이를 없이해달라고 구한다. 그럴 때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는 이제 나의 약함을 은사로 여긴다. 세상에서는 안 됐고 불쌍한 일에 지나지 않겠으나 그것으로 주는 나의 자리를 주의 성전에, 나의 행실을 주의 은혜를 맡은 자로 보존하려 하심이었다.
결국 점심을 먹고는 독한 진통제를 먹고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누구 전화로 화들짝 놀라며 울음으로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영혼을 두고 주께 아뢰다보니 나의 고통은 가벼워졌다. 주는 어김이 없으시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일관되심이 오늘 나의 죄 된 모습을 돌아보게 하신다. 누구의 어려움으로 주를 바라며 나의 어려움은 조용히 가려진다. 어쩌면 이는 복음의 근간이다. 그야말로 제 코가 석 자인 주제의 사람들이 주를 찬송하고 주의 성도들을 이끌었다. 모세는 쫓겨난 도망자 신세에 사막에 은둔하며 버려진 처지로 살았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까지 쫓겨나 처량하기 이를 데 없는 신세였다. 우리 주님은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떠돌이 비렁뱅이 신세처럼 여겨져도 마땅하다. 그런 입장에서 누가 누굴 인도하고 이 귀한 복음을 증거한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저들이 뭐라 하든, 내 신세가 어떠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앞서 바울이 증거한 것처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고후 6:8-10).” 이를 알면 알수록 욥이 그 주제에 엘리바스의 입을 빌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전하였던 말씀의 의미가 새로운 것이다. 저의 말이 마음에 남에 후에 성경을 기록하면서 저는 이 대목에서 아멘, 하지 않았을까? 이를 위해 우리 주님은 친히 나무에 달리셨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이를 전하는 베드로의 처지도 ‘~같으나’ 우리에게 부여된 놀라우신 주의 특권을 알았다. 나는 요즘 자주 그런 마음으로 붙들린다. 내가 뭐라고… 하며 주의 돌보심과 은총을 목격한다. 누가 나를 대할 때, 나의 고통이 나로 절망하게 할 때도 그렇게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시 77:14-15).” 이를 앎으로 복이다. 들음으로 복이다. 적어두고 이처럼 묵상할 수 있는 게 특권이다. 가끔은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그럴 때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이와 같은 진리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시 77:2).”
이 놀라운 은총 앞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13).” 주가 알게 하심이다. 그렇게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19-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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