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갈 4:13-14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시편 82:6-7
우리의 약한 것으로 굳세게 하고, 흔들리는 것으로 강하게 하며, 없는 것과 곤란한 것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 ‘회심’이 아니면 마주할 수 없는 육신의 일로, 더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우리가 언제 보장된 길을 덤덤히 걸었던가?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시 82:8).” 모든 게 주의 것임을 알고 주신 상황 가운데서 묵묵히 준행하는 걸음이었으니, 바울은 이를 상기시킨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갈 4:13-14).” 그럴 수 있었던 놀라운 마음이 변치 않기를.
오히려 어렵고 힘들 땐 주를 바라며 주만 따랐더니 살만하다 여겨질 때 도리어 세상을 기웃거리는 꼴이라. 결국은 주의 은혜가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복음이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은혜에 감사하자. 이를 감사한 줄 모를 때 허영이 또는 욕심이 우리로 세상을 동경하며 살게 한다. 어제는 그런 일로 저녁 식탁에서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 어디에 청약을 하네, 분양을 받네 하는 아내의 바람은 이해하지만 나는 분수에 맞게 하자는 것이고, 이만하면 됐다는 것인데 자꾸 누구의 도움을 바라고 그리해주겠다고 하였다며 답답해 하니, 보다 못해 아들놈이 나서서 실제적인 문제를 거론하였다. 얼마의 몇 프로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거기서 얼마를 대출 받았을 때 이자가 얼마고, 원금상환이 어떻고… 상속세가 어떻다면 재산세를 어찌 분산하여 줄일 수 있는지… 나는 그런 이야기에서 이제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였다.
그러니 온통 그러고들 사는 일인데 나는 아내가 그런 일에 너무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여 입을 다물었다. ‘아담 안의 모든 사람은 죽었다.’ 우리도 죽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얻는다. 이는 우리가 한 게 아니다. 결국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모르겠다. 이것이 나의 책임회피고 당면한 사실을 모면하려 드는 고약한 도주인지 알 수 없으나 아내의 성화나 기대를 이해하면서도 아이들 앞에서 그런저런 말로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을 어찌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고약한 버릇 가운데 하나가 회피하고 모로 누워 일찍 잠을 청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들 그러고 사는 현실에서 내가 무슨 이슬만 먹고 사는 요정인가, 하는 소릴 듣기도 할 법한데. 그런 용어로 표현하면 그래, 물질적인 이런저런 시달림이 나의 트라우마가 된 셈이다.
어쩌면 나는 이를 고상한 척 신앙 안에서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더는 시달림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믿음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위선적인 것인지. 나는 이만하면 충분하다며 감사하자고 하고 아내는 나를 어르고 달래며 어디에 무슨 신도시로 청약을 하네, 분양을 받네 하며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곧 우리의 어려움이 결코 어려움이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현실적인 문제니 영적인 문제니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접근하려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가 속한 오늘이 현실이면서 영적인 삶이 아니겠나? 우리는 이제 이것을 따로 분리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신앙생활은 신앙의 문제로 따로, 현실생활은 현실의 문제로 따로 접근하여 드는 자세가 그릇되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하는 말씀이 단지 표어나 시적인 의미 그 이상은 어렵다는 소릴까? 나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문제로 신앙과 직결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것이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공연한 나의 허상으로 거짓 꾸며진 마음인지, 그렇게 돌아누우면 공연히 속상하고 부끄럽고 남들이 부럽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장모 병원에 다녀온 아내는 그 사이 아들이 웬일로 전화를 해서 우리의 실제 형편과 사정을 묻고, 어디에 무엇을 청약하고 투자하기에 앞서 그에 따른 실질적인 셈법을 일러주었다고 하였다. 나는 그러는 게 미안하고 속상한데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소소한 이야기를 이 글에 다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곧 영적인 문제와 어찌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일이겠나, 하는 것이다. 결국 성경의 요지도 믿는 자는 새 생명으로 살라는 말씀인데,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그러니 뜬구름 잡는 일은 도리어 세상을 추구하는 이들의 셈과 같아서, 얼마가 있으면 얼마까지 대출이 되고 그럼 이를 몇 년 상환으로 어찌 갚아나가면 몇 년 후에 얼마나 되고 하는 식의 논법 앞에서 나는 차마 그 날들을 우리가 우리 마음껏 채우며 살 수 있나? 하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예전에 우리도 그렇게 사느라 골 빠진 거 아닌가? 다들 그러고 사느라 곤죽이 돼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믿네 마네 하면서 스스로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자 누구이겠나?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을 두고 끙끙 앓듯 씨름하며 고역을 치른들…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당하려고 하는가?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더는 그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 말을 도대체가 전달을 할 수가 없다. 있으면 있어서 있는 것 때문에 눈이 멀고, 없으면 없어서 없는 것 때문에 눈이 멀어서 모두가 청맹과니처럼 눈 뜬 장님으로 사는 꼴이었다.
그러니 아들이 듣다 그렇게 말이 없는 녀석이 외할머니도… 하면서 그 소유한 동대문 집을 어찌 처분하는 게 가장 유리한가 하고 일러주는데, 내가 듣기에는 명관이라. 소유를 팔아 어차피 그만큼의 세금을 물고 나머지는 그나마 상속세를 물지 않으려면 한 달에 얼마씩 살아생전에 가족들에게 연 얼마 범위 안에서 나눠주고 죽으면 그게 현명하다 일렀다.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려니 형님이 또 혹시나 하는 욕심을 내는 것이고, 여기저기 껄떡대는 무리가 한둘이 아니니 것도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강단 있게 그리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다. 들으며 나는 내가 낄 자리가 아닌듯하여 일어섰고 길어지는 말들로 행여 우리의 본질에서 벗어날까 조마조마하였다. 우리의 본질이라 하면, 우리도 죽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8).” 죽어야 사는 원리인데,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7:4).”
말씀으로 누구를 대한다는 게 내가 어찌 하는 일이 아니었다. 앞서 동대문 집에 대해서는 엄연히 거기서 신당을 모시고 살던 우상숭배의 온상으로 남은 것인데, 가급적 나는 어머니 살아생전에 어서 손을 떼고 얼마나 손해를 보든 이익을 보든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었으면… 하고, 이번에 입원하기 전에 말을 건넸을 때 저들은 그 말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이었으니. 내가 할 말은 거기까지이겠거니 하고, 그때에 나는 마음을 거두었다. 이를 두고 누구는 욕심이 없다느니 착하다느니 하고 좋은 소리로 얼버무리고, 누구는 현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 치부하기도 하는 것을 잘 알지만 나야말로 그런 소리들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은…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말을 더할 때가 있고 뺄 때가 있고, 마음을 둘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는데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나의 약함을 앞세워 더는 가담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그렇게 여기는 까닭으로 ‘당신은 시키는 대로만 해.’ 하는 소릴 듣는 것일 텐데, 그건 또 그럴 수 없는 것이 나의 분수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지금의 것으로 충만한 것은 저들이 부럽지 않고 어떤 포부나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나은 귀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인데… 더욱이 이와 같은 것을 나는 아내에게조차 설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말을 섞다 보면 말이 길어져 누가 어떤데, 누가 뭐라는데 하는 소리가 끝도 없어서.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2).”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제 주가 오라 하시면 가야 할 사람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걸 무슨 몇 년을 내다보고 몇 십 년 계획을 가지고 산다고 저리들 난리인지. 나는 오늘 말씀을 그리 받는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시 8:6-7).” 이것이 우리의 남은 숙명이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 4:30).”
그러니 가만 보면 신앙이 아무리 고상한들 돈 문제 앞에서는 사족도 못 쓰는 꼴이고 당장 그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우아한 믿음도 금세 잃어버리기 일쑤라.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 2:14).” 주가 당하신 일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어야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한데 여전히 종의 아들로 종노릇하는 꼴로 살아야 한다면,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7).”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꾸지람으로 오늘 나를 바로 세운다. 이는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0-11).” 곧 어떻게 하면 이문을 더 남길 수 있는가 고심하기보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18).” 이를 위해서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 오늘의 어려움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31).” 이에 따른 확신을 붙들고 사는 삶이 복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부디 이러한 시선과 마음과 삶의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기를,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떠서 말씀 앞에 앉아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시 8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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