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5
의식은 빙산의 일각으로 기억 아래에 있는 엄청난 무의식 위에 드러난다.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하며 부인하려해도 오늘 우리의 행동반경은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사람이 사는 동안 상처 없이 산 사람이 어디 있겠나? 누구에게는 억압이 되어 옥죄는 것이 누구에게는 헐거워서 싱겁다. 이를 인정하고 마주하고 숨기지 않으며 직면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건강한 것은 일단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고백한다는 것은 숨기지 않는 것으로 죄를 마주하고 주께 아뢰는 데서 건강한 내면을 확보한다. 곧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한 돌보심과 용서에 대한 확신이 있다. 믿음이 갖는 이 엄청난 에너지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무친 원망과 서러움까지도 녹여낸다.
가령 요셉의 경우 저는 자신을 팔아 애굽의 노예가 되게 한 형들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이를 주께 돌리는 것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50:20-21).” 저에게는 얼마든지 앙갚음 할 수 있는 권능이 있었다. 그것이 믿음 안에서 녹여져 주를 인정하고 바라는 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는 여러 일들 가운데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나의 유년은 억눌린 영혼 그 자체였다. 어려서부터 나의 무의식에는 부모에게 폐가 되는 존재라는 자책이 있었다. 나만 없으면… 하는 열등의식으로 나의 부모가 어떤 일로 곤경에 처할 때면 항상 그것이 나 때문이라고 여겼다. 나만 없으면 같은 반 아이들도 더 재미있을 것 같고, 누구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어떤 자책감은 동시에 같이 깊어졌다. 그래서 늘 놀림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할 때도 마땅하다고 여겼다. 소위 왕따니 집단 괴롭힘이니 소외와 외면을 당연하다는 듯 여길 때도 있었다. 기억이 닿지 않는 더 어린 시절을 추측해도 그래서 내겐 또 억눌린 자아에 대한 보상으로 성에 대한 집착과 광기어린 보복의 심리가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잠자리를 잡아 날개와 다리, 머리와 몸통 마디 하나하나를 잔인하게 뜯어내고 있다거나 공연히 화초를 짓이겨서 뭉개버린다거나.
공부도 못하는 열등생에 하는 짓은 밉상이고 말대꾸도 저열하게 하는 소년이었다. 무슨 일을 두고는 ‘내가 그렇지 뭐’ 하는 게 의식을 지배했다. 오죽하니 초등학교 5학년 서울로 전학을 왔을 때 일반 학교에서는 나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 나의 모친을 설득해서 특수학교에 보낼 것을 강요하였다. 이를 교무실 밖에서 듣고 서 있을 때, 조잘거리며 왁자한 복도의 소음과 찢어지게 울어대는 늦여름 매미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남았다. 나의 모친은 눈물로 호소했고 기어이 일반 학교에 버려두듯 전학을 시켰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누구의 어떤 사연이 어떤 무의식의 세계에 감추어진 무엇 때문이라는 논증은 중요하지 않다. 한참 심리학에 매료되어 이런저런 이유를 찾아 헤맬 때와는 달리 그런데도 어떻게 나의 상한 심령은 단련되었을까? 나에게는 글쓰기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에게는 그 어떤 일도 사사롭지 않고 우연한 것은 없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알게 된 누구와 저와 주고받은 편지쓰기와 그때 주저리주저리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것이 결코 우연한 계기가 아니었음을 이제는 확신한다. 아울러 오늘도 이처럼 글을 쓰고 묵상을 하고 말씀으로 말씀에 의지하는 일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내 안의 노여움이 나로 하여금 찬송하게 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누구의 사무치는 노여움을 볼 때 나는 내가 아는 주의 은혜를 저에게 알려주고 싶어 안달한다. 그럴 수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하루에도 몇 번씩이다. 넘겨짚는 것이지만, 요즘 자주 누구와 대화를 하게 되면서 저의 알 수 없는 열등의식을 안타까워한다. 저의 말은 장황하다. 말하고 싶었던 것 그 이상의 것에서 맴돈다. 저와의 대화가 피곤한 이유는 이미 읽힌 생각을 에둘러 너무 길게 돌아가서다. 물론 저는 상냥하고 예의바르다. 다만 저를 인정하고 가만히 들어줄 때만 그렇다. 설령 내가 저의 말에 어떤 생각을 더하면 저는 방어기제로 ‘다 알아요, 다들 그래요.’ 하는 식으로 자신을 옹호하면서 공격적인 말투가 된다. 그럴 때 해주고 싶은 말을 도로 삼키며 주의 이름을 되뇐다. 나로서는 저를 공격할 이유가 없다. 만일 내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저의 생각에 제동을 걸면 저는 내게 보이는 호의를 거둘 것이다. 실은 이와 같은 방어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내가 나를 계기로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식으로가 아니라 상한 심령으로다. 속된 말로 우리는 같은 환자다. 나는 저보다 별난 게 아니다. 나은 게 결코 아니다. 그럴 때 확신이 더하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일에 계신다. 모든 사건사고와 무관하지 않으시다. 모르시는 게 없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 40:28).” 당연히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 2:22).” 한 시도 내게서 눈을 떼신 적이 없었다. 내가 심히 주를 멀리하고 죄악 중에 있을 때에도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하나님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런 우리를 일깨우신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하신 말씀이 오늘 나에게 하시는 음성으로 들려져,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 곧 우리에게 더하시는 어려움도 실은 주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것이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실제로 우리 집으로 공부하러 오는 아이들의 면면이 온전한 경우가 드물다. 아내는 이를 무던하게 돌보고 받아들여 함께 한다. 어르고 달랠 줄 알고 그러는 동안 아이의 상한 영혼을 치료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어제도 특히 중학교 여자애들이 끝나고 갈 시간에 맞추어, 나더러 밑에서 지키고 서서 아이들 가는 것을 좀 보라고 하였다. 전날에도 불량한 아이들 서넛이 돌아다니며 시비를 걸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담배를 피워대곤 하였는데… 그래도 그렇지 누가 나 같은 것을 무서워나 하겠나? 그럼에도 그런 까닭은 그러고 있는 것으로 저들이 한 번 웃고 안도하며 돌아가는 것으로 족한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천 원 하는 호신용호루라기를 하나씩 건네며 누가 또 그러면 삑, 하고 불어! 하면서 손을 내밀 때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나는 믿는다. 우리의 기도는 저 아이들의 황폐한 영혼을 위한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싸구려 호루라기 하나 건네는 일뿐이고, 아파트 밑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다가 잘 가! 하고 손을 저어주는 게 전부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에 계신다.
그렇게 나는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된 것으로 감사하다. 누구보다 억눌리고 억압된 영혼으로 살았다 해도 실제로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특권을 누리며 살았다는 것을 안다. 더는 종의 영이 아니다. 아들의 영으로 누림을 익혀간다. 곧 우리의 예배가 일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그렇게 나의 노여움으로도 주를 찬송한다. 내 안의 서러움으로도 주의 이름을 부른다. 누군들 상처 없이 살았겠나? 그런데 누구는 이에 스스로 무장하고 자신의 무식이 또는 가난이 무시당할까 경계하며 미연에 공격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앞서 삐딱하고 욕하고 윽박지르는 것이 그 때문이다. 부디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시 84:6).”
그러므로 오늘 아침 말씀은 내게 이르신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누가 말을 길게 하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보며, 뭐라 할까 하여 ‘다들 그래요!’ 하고 방어부터 하는 저의 영혼을 대하면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나는 저의 모습에서 나를 보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살았던가? 그러면서 늘 날 위해, 내가 먼저, 나 위주로 세계가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인데.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
우리 인생은 끝도 없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정문을 내세워 시작한다. ‘만일 ~하였더라면, 한다면’ 하는 식의 곪아터진 방어기제가 나의 습관이 되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모든 일에 관여하시고 개입하신다는 사실 앞에 안도한다. 이제는 안심하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단지 날 위해서가 아니어서 또한 다행이다. 그렇게 우리로 이기게 하신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그래서 가끔은 몸서리치듯 ‘나에게 들리는 것이 저에게 보인다면’ 하는 가정문을 주께 아뢴다. 나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저에게도 들려지기를. 그러할 때,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시 84:5-6),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0) | 2021.06.18 |
---|---|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0) | 2021.06.17 |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0) | 2021.06.15 |
너희가 아는 바라 (0) | 2021.06.14 |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0) | 2021.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