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전봉석 2021. 6. 15. 05:37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 5:5-6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편 83:18

 

 

사는 게 다들 여러 모양이다. 서로가 좋을 때야 누군들 아니 그러하겠나? 무엇보다 돈 앞에서는 모두 허물어지기 일쑤여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를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게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게 순조로울 듯하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함인데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서서히 무너지는 둑 같다.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고, 감사가 그 삶을 주도하게 하는 것이 복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오직 말씀만 붙들고 말씀으로만 살려 하는 것이 귀하였다.

 

어떤 어려움이 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랄 수 있다. 이에 호소한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나의 주는 나의 모든 환난과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를 그 어려움에서 안으신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9).” 이를 알지 못하거나 부인하고 거절할 때 오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일정 시간 겪어야 비로소 겪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겠나? 우리의 본질은 참 악하다.

 

요즘 우리 동네가 아이들이 말썽이다. 서너 명이 몰려다니며 짓궂은 장난을 하는데 그 도가 넘은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저쪽 4단지 모 아파트에서 초등학교 아이가 게임만 한다고 뭐라 하는 엄마를 칼로 찌르는 사건이 있었다. 어제 우리 집에도 공부하는 아이들을 따라왔는지, 서너 명 아이가 열린 문을 발로 걷어차고 도망갔다가 다시 와서 또 그러기를 몇 번 했다. 그러다 중학교 여자 아이가 수업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한 녀석이 자기를 쳐다본다며 시비를 걸고 담배 연기를 아이 얼굴에 뿜었다. 문을 걷어차고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치는 거야 애들이니까 그렇다 하겠는데, 여자아이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는 데서 경비실에 알리고 경찰을 불렀다. 몇 차례 그와 유사한 동일소행이 신고접수 된 바 있었다. 아내는 무서운지 아이들 끝날 시간에 일찍 와서 그 앞에 좀 있으라고 하였다. 아이들의 소행 그 이상으로 치닫는 데는 분출하는 불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이다.

 

그러니 다를 사는 게 고역이라. 누구 말마따나 사는 게 지옥인 세상이다. 이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까? 당장에 주의 긍휼하심은 묘연하여 믿음으로 기다리는 소망으로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5-6).” 그러느니 돈이 빠른 듯하다. 애고 어른이고 다들 돈돈거리며 당장의 어떤 조치를 원하는데 그 대책이란 게 돈을 들여 가능할 것 같아서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되 주의 뜻을 따르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인데,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8).” 사는 날 동안 염려는 끊이질 않고….

 

그러할 때 말씀은 길을 제시하신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9-11).” 마치 내가 알아서 뭔가 조치를 취하며 사는 것 같지만 주가 우리로 지켜 화가 미치지 못하게 하신다. 이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무서울 데 없는 초딩, 중딩 아이들이 가장 무서운 것은 사리분별이 없어서이다. 출동한 경찰도 난감해하는 것이 초법적 나이의 아이들이라 기껏 할 수 있는 게 그 부모에게 알리는 일뿐인데, 부모들은 또 그들대로 사느라 정신이 팔려 어찌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구를 부를까?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 57:2).” 나는 앞서 다음에 설교할 본문을 펼치고 그 의미를 살피었다. 그렇듯 우리가 의뢰하고 부르짖을 수 있는 이름이 있음은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로 온전한 삶을 살게 하시는 이가 계셨으니,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65:9).” 그 관심과 사랑이 얼마 정도인가 하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만큼 나는 주목 받고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저 황량한 터에서 방황하는 아이들도 알 수만 있다면…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시 57:3).” 이와 같은 믿음으로 의지하고 소망으로 기다리며 인내로써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길이다.

 

이에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106:4-5).” 그렇게 하루하루가 주 앞에 다져지는 시간이었다. 막내 동생이 겸사겸사 먼 길을 다녀가고, 돌아오는 목요일에 주인은 개업식을 해야겠다며 이런저런 궁리를 한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먼저 나를 불러세우시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나로 하여금 중심을 주께 두게 하심인데,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열쇠는 주를 찬송하는 일이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시 57:4).” 비록 삶이 그와 같다 해도 우리 주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날을 경험한다. 누구의 험난한 삶과 그 고달픔에 대하여는 어찌 위로가 어렵다. 누구의 수고와 애씀에 대해서도 어찌 권면이 어렵다. 그 이유는 위로를 바라나 위로를 받지 못한다. 저마다 자신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위로를 모색하기 때문인데, 결국은 돈이다. 그것으로 위로함을 얻어 더 나은 삶을 꿈꾸다보니 파도 파도 끝이 없는 모래사장 같다. 한데 우리는 다르다. 어제도 언제 무슨 일로 그런 느낌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들 자기가 아는 것을 자랑하며 알아서 하겠다는 듯 굴 때 나는 바보처럼 모르는 것이라 오히려 감사했다. 성경은 내게 일러,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것으로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 것을 이제는 잘 안다. 그렇게 성경은 나를 붙드시고 이르시되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 5: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도로 돌아가는 성도들을 볼 때면, 믿는다는 이의 어처구니없는 광야를 마주할 때면 그게 다 자신이 안다, 옳다, 해오던 것에 대한 고집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이를 오늘 말씀에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4).” 그렇게 선을 이룰 수 있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는 정의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고 바라며 구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 믿음으로밖에는 달리 찬송이 나올 구멍은 없다.

 

굶주린 승냥이 떼처럼 아이들이 어슬렁거리며 길거리를 배회한다. 혹은 집구석에 처박혀 게임에 몰두한다. 아직 어린나이에 그 영혼이 다 떨린 듯하다. 겁이 없고 굳이 감정도 없다. 내남없이 짐승이 돼 간다. 이에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 부디 다른 마음을 품지 말라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되새긴다. 아니면…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 이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괴물의 모습인가? 하면 어찌 할까?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 말씀 따라 더 가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내 안에 쉬지 않는 육신의 소욕에 대하여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실제 이와 같은 현상이 오늘 우리 주변에 아니 우리 안에서 또는 나의 하루에도 몇 번씩 돌출되어 나타나지 않던가? 부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그럴 수 있는 길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길’뿐이다. 그 길은 믿음으로 소망 가운데 주를 바라는 묵묵함이다. 이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 더는 사람들처럼, 사회가 아무리 어떻다 해도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5-26).”

 

이에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