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전봉석 2021. 6. 23. 05:31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 1:6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 91:15

 

 

무엇이 되고, 안되고… 이뤄지고 이뤄지지 않고 하는 일에 우리는 몰두하며 그것으로 바라고 구한다. 어떤 일에 있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 같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그때 우리는 ‘되고, 안되고’를 넘어서는 일에 주목한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다.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선한 뜻을 행하신다. 이를 주목하는 데는 이것에도 저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곧 이 땅에서의 무엇은 그 이상의 함의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낀 시간’을 산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3).” 그 둘 사이, ‘사나 죽으나’의 일은 모두 하나의 일이어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고로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4).” 오늘을 하루 더 허락하심은 누구에게 유익을 끼치게 하려 하심인데,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데 주목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오늘은 누가 부친의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날이다. 울먹이며 말하는 저의 목소리가 나는 아팠다. 안 믿는 가정에서 안 믿는 가족들과 한 생을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을 시간에 대하여, 이제는 믿는 자로 주의 자녀로 육신의 혈육을 떠나보내야 하는 심정을 나는 가늠할 길 없어 마음이 더 어려웠다. ‘그래도 네가 용기를 내서 마지막 순간에 기도해라.’ 하고 권면하자 코로나 때문에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라 대신 기도문을 써달라고 해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슬픔을 억누를 필요까지는 없으나 그 이상의 것을 바라고 구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남겨진 이들의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기꺼이 그리해야 한다. 다음은 기도 내용의 전문이다.

 

‘우리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은 우리가 이처럼 슬픔 중에 모여, 이제 생을 마치고 이 땅을 떠나시는 아버지를 배웅하고자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런저런 모진 삶 가운데서도 오늘까지 함께 하여 주셔서, 우리 네 자매들, 각각 가정을 이루며, 건강하게 살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슬픈 마음을 어찌 말로다 형용할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심정이지만, 아버지를 통해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이생의 삶이, 더욱 복되고 바르게 하옵소서. 살아생전 아버지의 뜻을 잘 기리며, 더욱 열심히, 우애 깊게 살아가는 우리들 네 자매들이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는 엄마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시고, 남은 가족들의 슬픔도 위로하여 주옵소서. 연로하신 엄마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살아생전 이제 엄마와 셋째 언니도 하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복된 소원을 함께 이루어갈 수 있게 하옵소서.

이 자리에 함께 하신 고모님의 건강도 주께서 살펴주시옵고,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남은 가족들의 슬픔과 황망한 마음도 위로하여 주옵소서. 남은 장례절차나 모든 일정 가운데도 주님이 함께 하셔서, 모든 과정이 무탈하게 진행되도록 지켜주옵소서.

항상 우리를 위로하시고 평안을 더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음이 어려운 하루였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이야기로 하나가 되어 오늘에까지 이른 것을 회상하였다. 초등학교 4, 5학년 때 주일학교로 전도 받고 온 이후 믿음 안에서 서로가 하나 되기까지, 우리의 이야기 속에는 엄청난 사연과 구구절절한 삶의 여러 모양이 상흔으로 남았다. 방식은 묘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이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기이하여, 어떤 사건과 상황은 한참을 지나고서야 내 이야기로 포함이 된다. 그러니까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 무심했던 것이 가장 소중한 단서가 되는가 하면, 전혀 예상도 못한 일이 남은 생의 중심을 이루기도 한다. 즉 우리는 무엇이 ‘되고, 안되고’ 어떤 일의 표면만을 보고 섣불리 판단하려는 경향을 억제해야 한다. 오늘 말씀에서 나는 새삼 우리의 ‘낀 시간’에 대해 묵상하게 되는 것도 그것이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그 둘 사이에 끼었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복음의 확신이 참 좋다.

 

누구의 어떤 일도 당장의 것으로 우리는 염려하고 걱정하며 마음을 동동거리지만 이내 그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왜 굳이 고난일까? 역설적이게도 고난 중에 우리는 주를 바란다. 어려움이 있어 주 앞으로 온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30).” 우리가 누구 이야기에서 이를 본다. 바울의 사역에서, 모세와 다윗의 쓰임 받는 일에서도 우리는 주의 일을 본다. 시편은 이를 확실히 한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이러한 약속이 오늘에 이르러 내 안에 들어온 것이니, 이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일인가? 모든 사건과 사람과 상황과 사물의 전언이 우리에게로 들어온다. 내 이야기로 포함된다. 저의 아픔이 나를 아프게 하고, 저의 슬픔이 나로 슬프게 한다. 그것으로 주의 마음을 알고 그것으로 주의 사랑을 배우게 되는 일이다. 이에,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4-6).

 

그러니 우리의 남은 생이 어떠한가?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7-8).

 

우리도 마땅히 주를 알지 못하는 땅에서 맞이해야 하는 보응이었을 것인데, 우리는 이로써 주를 바란다. 오늘을 사는 우리로서는 두 세계, 이 땅과 저 하늘에서의 시간 사이에 ‘낀 시간’을 살아가는 것으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곧 우리에게는 새 이름이 부여된다. 더는 사람으로 흙에 지나지 않는 진흙의 가치에서 머물지 않는다. 때론 내가 애정을 두고 가치를 더해 애착을 갖고 몰두하던 일이나 사람이나 어떤 형태의 무엇에 대해,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바라고 더는 사무치지 않는 괴이한 상황을 우리는 여러 번 경험하였다.

 

가령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서도 저로 인해 죽고 못 살 것처럼 열렬히 사랑했던 마음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때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다. 이는 무엇에 대한 소중하였던 마음도 다르지 않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해지는 마음이 때로는 섬뜩할 정도이다. 그러니 지혜자의 말처럼 헛되고 헛된 것으로, 이 땅에서의 것은 무엇이든 불문하고 다 지나고 볼 일이다. 사람이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그 모든 게 시들하여져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더는 옳고 그름도, 싫고 좋음도, 잘되고 못됨도 모두가 허사여서 오직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우리 안에 두신 ‘착한 일’ 온전히 주를 바라고 위하며 찬송하고 믿음으로 바라게 하시는 것들 외에는 소중한 게 없나니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3-24).”

 

오늘 하루에 여기에 육신으로 두심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 가치와 소중함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묵상함으로 잊지 말아야 한다. 얼마나 쉬 흔들리고 넘어지기 잘하는지. 얼마나 자주 현혹되고 누구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하는지. 우리의 약함이 도리어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었다. 하여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는 나의 약함을 알면 알수록 부수적인 곁가지들을 자꾸 쳐낸다. 누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는 물론 내게 그처럼 애착이 가고 애정이 더해지는 것들에 대하여도 ‘낀 시간’을 사는 동안에는 아차, 싶을 때 이미 헛발을 딛고 서기 일쑤라.

 

종종 마주치는 목사 내외가 내게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하나의 답밖에 제시할 게 없었다. 견디는 것, 때로는 견디는 것으로 이미 충분한 주의 일에 대하여, 더욱이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 내가 어찌 하려하는 모든 게 자칫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될 수 있음을 잘 안다. 저들은 내가 대단한 줄 알지만(그 긴 공사 중에도 다른 데로 안 옮기고, 아무도 오지 않는데도 교회를 지키고 있는 일에 대하여) 나는 오히려 하는 게 없음으로 홀가분하고, 나의 하는 일 없음이 내 일인 것을 아는 까닭은 그것으로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누구를 생각하며 위하여 기도하고, 들어앉아 내게 맡기신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으로 주가 일 하시게 한다. 이를 어찌 말로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저들은 서너 교회가 연합하여 더 넓히고 확장하여 다른 층으로 교회를 옮겼으나 어쩌다 다들 떠나고 저들만 남게 되어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인 것을 짐작하고 있는 것이라… 나는 묻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다. 이를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오늘의 모든 일 속에는 주의 섭리가 있다. 오늘은 창세전 이 땅에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이 있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주목하신 날이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그렇게 친정 아버지의 연명장치를 떼기에 앞서 저의 귀에 대고 기도하기를 권하였던 것은 죽은 자를 위함이 아닌 산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사연을 더해보면 참으로 기구하였던 생이라. 누가 자살을 하였고, 누가 무슨 종교에 심취하였고, 저마다의 살 궁리로 사느라 사는 일에 온갖 잡신의 용한 기운도 마다하지 않았던 생이었으니. 부디 우리는 바로 주목하기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30).” 이는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7).” 이에 주께 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 91: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