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편 93:5
흐렸다 개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오락가락 한다. 덕분에 나의 몸에는 파스가 떼일 날이 없이 그 자리마다 붉게 성이 났다. 전날에는 숨쉬기가 어려워서 정신과로 갔고 어제는 내과로 갔다. 이것저것 검사를 여러 개 했는데도 돌아오는 말은 특별한 게 없다는 소리들뿐이었다. 나는 종종 에스레이에 찍힌 내 몸을 볼 때면 가련하면서도 고맙다. 나와 함께 하는 생의 이야기에는 몸이 따른다. 이제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되었다(빌 3:3). 할 때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6).” 하는 말씀에서 한참을 머물며 생각하였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육신의 관여를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새삼 드는 생각은 일일이 끌려 다니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먼 길을 걸어서 오후에나 교회에 당도하여 잠깐 누웠는데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그러니 육신을 입고 살 때에 몸의 지배를 무시할 수 없듯이 우리의 이런저런 관계에 있어서도 저들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결국 누구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아이는 제 엄마가 보지도 않을 편지를 써서 글방에 올렸다. 장례식장이 집 근처라 내일 밤에는 아무래도 다녀와야겠다. 누구의 슬픔이나 어떤 이의 염려와 탄식을 외면할 수 없다. 나도 나의 몸으로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상황인데, 우리 안에 두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마다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때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말씀은 나를 붙들어 앉히신다.
그러니까 왜 이런 일이? 하는 의구심과 함께 고단함과 어려움이 사람을 난처하게 할 때 하나님의 의중을 헤아려 알기에는 우리의 지혜는 가당치도 않다. 그러니 성령으로밖에.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걷고 또 걸으며 회의하고 우울해하다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할 때 내 속이 어떠하든지, 형편이 또 어떠하든지 나를 세워 말씀 앞으로 붙들어두어야 한다. 감추인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숨은 의도가 있으신 것을, 이걸 억지로 풀어보려 이런저런 꾀를 내다가는 그릇된 길로 행하기 십상이다. 내과의는 엑스레이로 비춘 내 몸을 이리저리 보여주며, 휘고 비틀린 기형적인 몸으로 인한 게 아니겠나? 하는 소견을 낼 뿐 달리 방도가 없는 말투였다. 나는 이를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기뻐해야 할지 어쩔지. 저의 말마따나 다시 돌아 제자리인 것을 두고 우리는 대체 무슨 기대를 하며 살 수 있겠나? 육신의 일은 가히 허무할 따름이다.
그러니 나는 다시 말씀 앞에 앉는다. 나를 이해하는 일이 내 곁에 두시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고, 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중을 바로 알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 스트레스가 많으신지. 의사는 더 할 말이 없는지 괜한 소리를 하는가했더니, 감당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라는 소리였다. 이런! 그걸 누가 모르나? 그 이상의 것을 내가 바라는 것도 아닌데 육신은 앞서고 마음은 저 혼자 나대듯이 쩔쩔매는 일들에 대하여.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하면 이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이겠거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것으로 주를 바라게 하시는 것을. 하여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하는 오늘 바울 사도의 고백이 내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공황이니 불안이니 하는 진단과 처방의 여러 형태는 실제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감당해야 할 몫이란 소리고 그런데다 하루걸러 비가 오락가락 하듯 기압골이 불안정하니 어쩌겠나? 이런 날은 이렇게, 저런 날은 저렇게 주를 바라며 ‘오직 내가 그리스리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위하여 사는 일이다. 그러할 때에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시 93:5).”
내 안에 이상한 느낌은 그것이다. 죽겠는데 살겠다. 힘든데 할만하다. 이러한 육신으로 무얼 하겠나싶은데 그만큼씩 하게 하시는 일이 있었으니,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 우리의 구구한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경은 목적이 하나다. 오직 하나님을 계시한다. 드러내고 나타낸다. 논증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다. 선포한다. 그렇다는 것이다. 거기에 의심이 들든, 토를 달든, 그것으로 회의와 갈등을 하든, 씨름을 하든,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좀 과장하면 나는 내 몸을 엑스레이로 찍어놓은 기이한 형태의 모양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였다. 어떤 의도로 저리 빚으셨을까? 몸은 내게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의사의 커다란 모니터 앞에 띄워진 여러 장의 사진에서 저가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이 달랐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길에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하고 어떤 불안이 마음을 쥐고 흔드는지, 나는 호주머니 속에서 안정제를 꺼내어 삼키고는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두었다. 그렇지!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나타난 일은 영원히 내게 속하였다.’ 아직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는 억지로 알 수는 없으나 이미 알게 하시고 함께 하게 하시는 이 몸의 일에서는 점점 더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우리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심이다. 누구는 절망하고 누구는 더욱 하나님을 멀리하겠으나,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어쩌겠나?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20).” 서로의 가는 길이 다르고 바라보는 저편의 세계가 다른 것일 텐데.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정작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그렇게 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키워드는 성경이다. 말씀으로뿐이다. 설령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이와 같이 돼도 않을 일인 것을 잘 아시면서, ‘산상수훈’의 말씀이 우리로 더욱 절망하게 하고 ‘성령의 열매’가 우리로 더욱 가당치도 않을 일인 것을 알게 하시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하심으로 모든 게 다 이루진 것을 선포하신다. 우리에게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알게 하심으로 그와 같은 진리로 다가오게 하신다. 그로 인하여 주를 바라게 하신다. 주를 바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을 나의 약함은 아주 강력하게 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를 나의 구주로 아버지로 부를 때, 이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그렇게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1:20).”
그런 거 보면 마음먹기 나름이란 말이 정답이지 싶다. 그럼에도 자기 배를 섬김으로 부끄러움도 마다하지 않으려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 1:9).” 우리에게 두신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아멘’ 한다. 곧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 내 몸의 일보다 그러한 육신의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전념하게 하시려고,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아, 그리 하시려고 나에게 그리하고 계심을, 나는 터벅터벅 걸어오면서 실의에 빠졌다가 새 힘을 얻기도 하였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1).” 더 나은 기쁜 게 어디 있었던가?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시고 말씀으로 하루를 또 마주하게 하심이 내게 더하시는 은혜였다. 그렇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 2:4).”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몸에 속해 사는 동안 육신의 질병으로 또는 정신적인 어려움으로 우리의 시달림은 끝도 없으나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다들 이런저런 할 말들이 왜 없겠나? 그러나 성경의 목적과 같이 우리의 이야기는 하나를 담고자함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며 오늘도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어떠하든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0-11).” 이보다 더 중요하고 분명한 사실은 없었다. 하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 하는 오늘 사도의 결의가 내 것이 된다. 그렇게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6).” 이는 곧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20-21).” 곧 사는 데 따른 이유와 목적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이에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시 9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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